일기예보대로 정말 시원한 아침이다.
피렌체에서 아레초에 다녀온 날처럼 오늘은 구름 많고 흐릴 예정이라, 빈 근교인 멜크Melk에 가기로 했다.
기후 위기는 9월초 빈 날씨를 한여름으로 만들어버렸기에, 근교 여행은 선택지 없이 햇볕 햇빛이 약한 날이어야 가능하다.
오전 8시 10분, U3에 올라 서역Westbahnhof로 향한다.
서역은 지금의 빈 중앙역Hauptbahnhof이 남역이었던 시절엔 수많은 열차가 드나들던 가장 중요한 기차역이었으나 지금은 Westbahn
-사철-의 근거지역이고 ÖBB-오스트리아 철도청-열차는 거의 단거리 기차만 운행되는 한산한 역이 되었다.
서역의 발매기에서 Einfach-Raus-Ticket 아인파흐라우스티켓을 구입하려 했으나 컨택리스인 트래블월렛이 원활하지 않아서
티켓 오피스를 통해 티켓을 구입했다. 직원은 여권을 확인하더니, 대표자인 남편 이름과 인원 수를 기재하여 티켓을 인쇄해 주었다.
Einfach-Raus-Ticket은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하루-평일은 9시 이후-종일 ÖBB에서 운행하는 S, R, REX, CJX열차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티켓으로, 빠른 열차인 RJ와 RJX 그리고 Westbahn에서 운행하는 열차엔 승차할 수 없다.
오전 9시 18분, 텅 빈 암슈테텐행 CJX는 멜크로 향하고 10시 21분, 열차는 잔뜩 흐린 멜크역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빈에 살던 2005년과 2008년 2번 멜크엘 왔으나 그땐 모두 승용차로 움직였기에 기차를 타고 이곳에 온 건 처음이다.
기차역에서 구시가로 향하는 낯선 길, 거대한 멜크수도원이 거리로 쏟아질 듯 매우 가깝다.
마을 초입에 위치한 성당에 들른 후, 구름 가득한 멜크 구시가에 들어서니 옛 기억이 떠오른다.
좁은 거리 사이로 늘어선 나즈막한 건물들이 동네를 환하고 예쁘게 매만져주고 있다.
멜크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얕은 비탈이다.
수도원 입구에는 1718년이라는 로마자가 새겨져 있고 왼편엔 호리병과 지팡이를 든 성야고보-산티아고-조각상이 있다.
수도원의 역사는 8세기부터 시작되고 베네딕트회 수도사들과 함께한 멜크수도원의 역사는 11세기말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긴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재건축한 수도원 건물은 1738년 화재로 상당 부분 소실된 후 1745년 바로크양식으로 재건하여 현재에 이른다.
티켓을 구입하고 중정을 지나서 오후 11시 10분, 수도원 내부로 입장했다.
그런데, 수도원 복도 사진을 찍고 나니 촬영금지 표시가 있어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내부의 모든 공간이 촬영금지란다.
멜크엔 2번 왔으나 수도원엔 2005년에만 방문했는데, 그때-사진 잘 안 찍던 -도 촬영금지였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2000년대 초반 촬영이 불가했던 파리 오르세는 7-8년전에, 빈 쉔브룬마저 올해부턴 촬영이 가능해졌는데 여긴 아직도 금지란다.
그러다보니 몇인지 알 수 없는 전시실 여럿-아마 5~6개-을 거친 후에 본 16세기초 제작한 제대화만이 기억날 뿐이다.
8개의 세워진 패널 앞뒷면에 예수의 생애와 수난, 카톨릭 성인들을 그려넣은 제대화로, 과거 방문시의 기억과 연결되는 유일한 작품이다.
사실 전시실을 관람하면서 끝도 없이 계속되는 가이드투어-대부분 독일어, 수도원 자체 운영일 수도. 단 한 팀만 한국 패키지-팀들로 인해
복잡했는데, 한쪽 벽면을 가릴 만큼 거대한 제대화가 있는 공간은 특히 북적이고 번잡스러워서 제대로 보기 위해 아주 오래 기다려야 했다.
몇 개의 방을 지나 이른 곳은 수도원 성당의 정면 파사드가 보이는 테라스다.
꼭대기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승리의 징표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손에 들고 있고, 아래쪽엔 사도 베드로와 바울, 성미카엘 대천사와
성라파엘 대천사 조각상이 복원을 마친 화사한 색감의 파사드를 장식하고 있다.
수도원 성당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프레스코화가 아름다운 도서관-서고-이다.
이곳에는 약 십만 권의 책과 9세기~15세기 필사본 1200여개, 17~18세기 필사본 600여개와 750개의 초기 간행본이 소장되어있다 한다.
최종 전시실인 도서관에 이르니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틈에 끼어 아쉽기 그지없는 사진을 남겼다.
독일어가이드투어객들은 도서관에서 인사를 나눈 후 흩어져 수도원 성당으로 향한다.
와, 감탄할 수밖에 없는, 지금까지 본 유럽 성당 중 가장 호화로운 성당 내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도 촬영금지 표지가 있으나 너나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이 맨눈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
멜크 수도원을 두 번 관람한 소감은 이러하다.
거대한 수도원에서 볼 수 있는 전시실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촬영불가에, 특징적인 것은 물론 감동적인 것도 찾기 쉽지 않으니
유료 입장-€16-인 내부관람은 패스하고, 수도원 외관과 중정 그리고 호화로움의 극치인 성당은 무료 입장이니 이곳만 관람하면 될 듯하다.
성당을 나와서 바라본 수도원 중정이 아까보다 훨씬 북적인다.
300년 가까이 된 수도원 외관이 이토록 곱고 화사한 것은 2018년까지 40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복원 공사 덕분이다.
전망대 아래층의 샵에 들러 한국어로 된 소책자를 하나 구입했으나 설명 중심이라 사진이 너무 적어 아쉬웠다.
수도원 입구 옆에 자리한, 높지 않으나 360도 조망이 가능한 전망대-유료. 입장권에 포함-에 올랐다.
전망대를 한 바퀴 돌면서 보이는 뷰가 참 예쁘고 평화롭다.
아까 입장했던 연분홍 파스텔톤 파빌리온도 보이고 수도원에 딸린 초록 정원 그리고 멜크 마을이 한눈에 잡힌다.
여전히 흐리고 찌푸린 날씨.
수도원 건물을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고, 수도원부속학교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내려다본다.
전망대를 내려와 수도원 입구를 나와서 아까 봐두었던 구시가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
걷다가 만난 어느 건물의 출입문 위엔 '섭리의 눈'-삼각형 속 세상을 보는 눈. 삼각은 삼위일체-이 선물처럼 반짝이고 있다.
오후 1시 20분, 레스토랑 야외 좌석과 실내를 통과하면 등장하는 정원 자리가 고풍스럽고 평온하다.
우리는 탄산수를 요청하고 생선요리인 점심 메뉴를 주문했는데, 크뇌델 든 수프도 좋았지만 생선이 진짜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건물 앞 야외자리는 빈 좌석 없이 완전 만석이다.
그새 하늘은 구름을 살짝 몰아내버리고, 산뜻하고 눈부신 제 빛깔을 드러내고 있다.
옛 추억을 되살리려 구시가를 좀 더 걸었다.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 도나우강이 등장하고 이곳에서는 수도원 성당의 정면 파사드와 테라스가 고스란히 보인다.
아까 테라스에 머물렀을 때 강쪽으로 충분히 조망이 가능했을텐데 왜 그땐 성당 파사드만 보고 있었는지, 뒤를 보지 못하고
이 멋진 풍경을 그냥 지나쳤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멜크를 떠나야 할 시간, 기차역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역 앞에서는 여행을 마친 듯한, 잘 차려입은 장년의 여인들이 포옹을 한 후 서로에게 손을 흔들고는, 캐리어를 끌면서 자리를 떠나고 있다.
점심식사할 때 충분히 물을 섭취했고 더운 날이 아닌데도 갈증이 심해, 기차역 자판기에서 시원한 탄산수를 구입했다.
오후 3시 40분 멜크를 떠난 CJX는 1시간 후 빈 서역에 도착했다.
오후 7시, 그제 인터스파에서 구입한 삼겹살을 구워-남편 담당-서 감자야채샐러드, 볶음김치, 맥주와 함께 즐겼다.
하루가 또 이렇게 흘러 지나간다.
이번 여행의 남은 시간은 단 사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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