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에서 온전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남은 한식거리를 쓸어담아 카레, 미역국, 볶음김치로 아침상을 차리고 후식으로 납작복숭아와 마트표 스타벅스아이스커피도 먹었다.
오전 9시 50분, 어제처럼 Stubentor역을 향해 U3에 올랐다.
오늘의 첫 일정은 오토 바그너가 모더니즘을 담아 건립한 오스트리아 우편저축은행 Postsparkasse이다.
빈에 거주할 때나 그 이후 여행 왔을 때 지나치면서 본 적은 여러 번 있으나 건물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건 처음이다.
건물 외관은 방수화강암과 대리석을 사용했고 당시로서는 신소재인 알루미늄을 내외부에 활용했으며 실내도 미적으로 디자인했다.
2022년에 빈 응용예술대학이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은행홀은 전시 공간과 카페가 되었다고 하는데,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중앙 출입문 왼쪽 벽면엔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징하는 쌍두독수리가 용맹스럽게 부조되어 있다.
인기 관광지역에서 조금 벗어난 구시가, 휴일이라 주변이 적막하리만치 고요하다.
발길 닿는대로 거리를 가는 중, 우크라이나 번호판을 부착한 승용차가 도로 주차구획선에 줄줄이 주차되어 있다.
고급 승용차는 아니지만 2년 넘게 전쟁 중인 국가의 차량이, 1인당 gdp가 6,000달러도 안되는 나라의 차량이 유럽 영세중립국-
오스트리아 1인당 gdp 61,000달러대. 2024년-의 수도 한복판에서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는 것은 슬프면서도 정말 분노할 일이다.
자국의 전쟁 상황에서 자차로 도피하여 물가 비싼 타국에서 머물 수 있는 건 그들이 경제적으로 최상위층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원인과 발단에 관계없이 전쟁이 자아내는 비극과 고통은 결국 민초들의 몫인 것이다.
셜록홈즈박물관이 있는 런던 베이커스트리트처럼 빈에도 Bäckerstrasse배커슈트라쎄가 있다.
이곳에도 분명히 어딘가에 제빵사의 흔적이 있을텐데, 가도가도 자취는 나타나지 않고 거리만 길게 이어지고 있다.
배커슈트라쎄와 만나는 넓지 않은 광장에 근사한 건축물들이 모여있다.
그 중 정면 중앙에 자리한, 17세기에 세워진 예수회성당에 홀로 들어서니 근엄한 미사 중이다.
잠시 들여다본 성당 내부는 금빛으로 출렁였으며, 마치 돔이 있는 듯 그려놓은 신자석의 천장 중앙이 매우 이채로웠다.
Bäckerstrasse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건물은 13세기 후반부터 지어졌다고 한다.
1층과 2층 사이의 정면 오른쪽 모서리에는 늑대와 안경을 낀 소가 마주보고 트릭트랙-중세 주사위 보드게임-을 하는 벽화가 있는데,
독특하고 재미난 이 벽화는 1978년에 발견되었다.
배커슈트라쎄에서 찾지 못한 제빵의 흔적은 Grünangergasse의 Bäckerhaus배커하우스에서 만날 수 있었다.
빵 굽는 장인 한스 피셔를 위해 1705년에 지어졌지만, 그 이전인 15세기부터 이곳에서는 빵을 굽기 시작했다고 한다.
출입문 위 벽면엔 크루아상의 원조인 Kiperl-13세기부터-을 비롯하여 다양한 빵의 형태가 부조되어 있다.
빈을 배경으로 한 영화 '비포선라이즈'에 나오는 클라이네스카페 야외 좌석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예전엔 블로그나 유튜브에 '비포선라이즈 따라잡기'란 주제의 글이나 영상이 많았는데, Sperl이나 Kleines는 빠지지 않는 장소였다.
파란 하늘 아래 서있는 푸른 신호등은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민들의 의식이자 다짐이다.
숙소에서 먹는 점심 메뉴는 비빔면과 감자샐러드다.
어릴 땐 빵 없인 못하는 빵순이였으나, 오스트리아에 살던 때부터는 오히려 한식파가 되어버렸다.
미니 수박, 요거트와 함께한 휴식 메뉴는 유튜브 화면에 올라와있던 2015년 드라마 '사랑하는 은동아' 끝까지 몰아보기였는데
궁금함에 이끌려 3시간을 시청하고 나니, 개연성 없는 뻔한 신파에 헛웃음이 났다. 정말 현실에는 없는.
볶음밥과 볶음김치로 이른 저녁을 해결하고난 오후 6시, 구시가 밤 구경을 나섰다.
여행 내내 우리의 편리한 발이 돼준 U3를 타고 Volkstheater폭스테아터에 내렸고, 국회의사당을 지나 다다른 시청사 광장엔
20여년전 가을처럼 필름페스티벌을 종료한 자리를 채울 서커스 공연 채비에 여념이 없다.
트램 D를 타고 오페라하우스에 내렸다.
알베르티나 앞을 걷고 캐른트너를 지나고 콜마크트를 스쳐 다시 슈테판 광장에 이르렀다.
낮고 얕은 저녁 불빛 사이로 빈의 구시가는 가을 길목에 선 듯 차분히 가라앉고 있다.
약간의 염려와 함께 출발한 이번 여행, 끝 지점에 닿아 돌아보니 어떤 생각이 들까.
늘 그렇듯 여행 자체는 좋았으나, 예상 못한 더위로 몸은 고단했고 갖은 걱정으로 마음은 힘겨웠다.
모든 상황이 안온하기를 기원하며 우리는 내일 서울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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