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늘 걸쳐 있던 안개가 오늘은 살짝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일요일에 바깥 길을 헤매는 것도 퍽 오래간만이다.
오늘은 운터슈팅켄브룬에 살던 지난 초여름, 길을 잃고 가지 못했던 빈 숲으로 향한다.
지난 번의 실패를 거울 삼아 철저하고 완벽하게 준비를 했는데 유비무환의 보람이 제대로 있으려나.
빈숲은 빈의 북서에서 남쪽으로 펼쳐져 있는 광대한 녹지공간이다. 북부엔 하일리겐슈타트와 그린칭이 있다.
우리 목적지는 베토벤의 흔적이 살아있는 하일리겐슈타트다.
지도의 친절하고 상세한 안내대로, 하일리겐슈타트 근처 주차공간에 차를 멈췄다. 나무가 많은 평화로운 동네다.
조금 걷다보면 한적한 공원이 나타나고, 곧 트램 종점과 베토벤이 1808년에 머물렀던 자그마한 집이 눈에 띈다.
큰 길가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음 옮기면 나무와 시내가 이어진 베토벤 산책로다.
베토벤이 전원교향곡의 악상을 떠올린 유명한 산책길이란다.
눈을 감고 상쾌한 바람을 맡으려니 사면에서 날아온 나무 향이 코 끝을 쓰다듬는다.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 정답게 걸어가는 중년부부, 장비까지 갖추고 걷기에 여념없는 사람, 간혹 보이는 동양인.
산책로 끝에는 1863년에 세워진 베토벤 기념비가 있다.
근처 주택가에는 1802년 어느 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안 베토벤이 유서를 쓰고 두문불출했던 집이 있다.
외부 공사 중이라 철근과 안전망이 외벽 전체를 감싸고 있고, 간혹 기웃거리는 관광객만 있을 뿐 적막하다.
아직도 누군가가 살고 있는지 집 안에선 TV 소리가 흘러나온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의 집'이 있는 골목길의 모양새가 정겹고 어여쁘다.
특히 작은 타일을 이용하여 화려하면서도 단아하게 장식한 어느 집 외벽을 보는 순간, 도저히 감탄사를 아낄 수가 없다.
유서의 집이 있는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작은 광장이 보이는데, 광장 주변엔 호이리게들이 많이 늘어서 있다.
그 중 '마이어'라는 호이리게는 베토벤이 1817년에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소박한 집 주위를 보고 있으니 일본인 몇 명이 짧은 소리로 베또벤하우스 어쩌고저쩌고하며 사진을 찍는다.
베토벤하우스 주변 작은 공원엔 또다른 베토벤 조각상이 있다.
베토벤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보니 갑자기 베토벤의 어느 교향곡이 떠올라 내 머릿속도 헝클어져 버린다.
차를 멈춰놓은 곳으로 돌아와 다시 움직인다.
하일리겐슈타트와 그린칭 북쪽 언덕의 칼렌베르크로 가는 길은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483m 높이까지 오르는 구불거리는 도로과 산책로가 무척 깔끔하다.
하늘은 맑고 푸른데, 칼렌베르크에서 바라보는 빈 시내와 도나우강이 막을 쳐놓은듯 뿌옇다.
전망대에 잠시 서 있는 사이, 많이 걸어 지친 다리가 스르르 풀려 내린다.
전망 좋은 칼렌베르크 야외레스토랑에는 가을 바람이 가냘프게 흘러든다.
머리칼 끝 갈빛이 출렁이는 햇살 따라 가늘게 반짝이는 가을날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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