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젖니 뽑는 날


우리 아들녀석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이 뽑기다.

3년 전, 흔들리는 앞니를 해결하기 위해 치과를 찾았을 때, 입을 앙다문 채 진찰대에 누워있는 걸 본 순간, 난 알아챘다.

녀석의 진짜 최전방 공포를. 인내심 약한 의사는 금세 발치를 포기했고, 난 녀석을 달래고 위협하여 다음날 손목을 잡아

또 치과엘 갔으나 역시 실패.

 

그보다 더 어렸을 때 받았던 충치 치료엔 의연했었는데 집으로 돌아와 눈물 빠지게 야단을 맞았으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들 이 뽑기의 돌격 선봉장은 남편이었다. 우리 어릴 적 쓰던 고전적 방법, 손도 못 대게 엄살 부리는 녀석의

흔들리는 이를 튼튼한 실로 묶은 후 한눈 파는 사이 쑤욱~

 

그저께 목요일 아침, 학교엘 가기 위해 지하철로 향하던 중 난데없이 이를 뽑아야 한다는 녀석.

녀석이 먼저 발치 얘길 꺼냈다는 건 이의 수명이 하루도 안 남았다는 거다.

 

금요일 저녁, 드디어 녀석이 실을 찾는다. 이는 만지지도 못하게 하며 실로만 연신 묶어댄다.

처음엔 한겹, 다음엔 두겹, 그다음엔 세겹. 계속 끊어지기만 하는 실이 약하다며 두꺼운 실을 내놓으라며 울상이다.

그 와중 이에선 붉은피가 뚝뚝 떨어지니 드디어 남편이 칼을 빼들었다. 솜을 들고 입 안으로 돌격이다.

울 듯한 얼굴로 거부하며 도망다니던 녀석도 다른 방법이 없는 걸 아는지 결국 남편의 손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손이 들어간지 1초도 안 되어, 콩 반쪽만한 귀여운 젖니가 튀어나왔다.

1시간 동안이나 전투를 치른 얼굴에 땀이 흐른다. 유치원을 4년이나 다닌 덕에 어디서나 씩씩한 녀석~

이런 사소한 일을 무시무시해한다는 건 평상시 모습으로만 보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누구든 보이는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둑어둑해지는 토요일 오후, 오늘 저녁 메뉴는 고추장 삼겹살이다.

이 하나가 모자라 제대로 못 먹는다며 너스레를 떠는 아들녀석~

지금 책상 위엔 아직 던질 자리를 못 찾은, 어제 뽑은 젖니가 사뿐히 앉아있다.

'탐사('04~08) > 빈에서 부친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겨울날  (0) 2005.11.24
아름다운 평등  (0) 2005.11.16
비엔나의 가을  (0) 2005.09.13
세례 받는 날  (0) 2005.09.03
비엔나에 입성하다  (0) 2005.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