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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겨울 건너기

우르릉 통통통 피시식.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던 보름쯤 전 토요일 밤. 미묘한 요동과 함께 요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뭔 소리래? 꾸벅꾸벅 졸다 말고 화들짝 놀라 큰밥돌에게 물어보니 차에 탈이 난 듯했다.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 시각과 도로였지만,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을 반기듯 갑작스레 달라붙던 옆 차선의 승용차를

피하느라 속력을 줄이지 못한 채 핸들을 틀었던 까닭, 차선 사이에 턱이 있을 것이라 전혀 짐작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급히 근처에 차를 세우고 차의 상태를 살펴보니, 이런이런, 오른쪽 앞뒤 두 타이어에 모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스페어타이어는 분명 하나밖에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차를 그곳에 그대로 두고 귀가하는 쪽을 택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우리를 집까지 데려다줄 버스가 있었던 것.

 

다음날, 평화로워야 할 일요일 아침이 분주하고 번거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일요일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공휴일은 레스토랑과 주유소, 주유소샵을 제외하고는 모든 상점이 휴무.

더구나 차 없이는 가기 힘든 곳에 있는 회사에, 큰밥돌은 다음날인 월요일엔 세상 없어도 아침 일찍부터 가야 했기에

하루 안에 차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지인에게 구원 요청을 하여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유소에 딸린 타이어샵을

수소문했지만 하필이면 우리 차에 맞는 타이어는 부재 중.

 

그래서 추천 받은 차선책은 렌터카였다.

이 나라에 연중무휴에다가 24시간 오픈하는 렌터카업체가 있다니, 게다가 우리집에서 가깝기까지.

커다란 사무실에서 상담을 마치고 나온 우리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쬐끄마한 차 하나.

 

" 무슨 차가 이렇게 코딱지만해? 그리고, 차에 뭐 이렇게 낙서가 많아? 29유로라니, 차에 온통 렌터카 광고 투성이군!

이걸 어떻게 타냐고 창피하게, 사람들이 쳐다볼 거 아냐!"

내 말에 우리 알뜰(?)한 큰밥돌 왈, "어차피 월요일 오후까지만 탈 차라서 제일 싼 걸로 달랬거든."

"그럼 진짜 하루에 29유로야?", "아니 세금, 보험료까지 다해서 45유로야."  

 

잠시잠깐 탈 차라서 제일 저렴한 걸로 골랐다니 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차에 올라보니 정말 작다. 이탈리아 차 '피아트 푼토'인데 진짜 딱 우리나라 티코만하다.

크지 않은 내 체격에도 의자가 비좁다. 게다가 차량 외부에 도배된 글자와 숫자들이라니.

 

그래도 큰밥돌은 그 차를 몰고 비엔나 1구로 갔다. 그곳에는 중세가 있고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그곳엘 가면 처음 여행 왔었던 그때의 설렘이 그대로 남겨져 있어 늘 가슴이 뛴다.

 

그런데 1구로 가는 도중, 어느 누구도 우리가 탄 재미있는 렌터카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던져주지 않는다. 아하, 그랬구나. 나만의 비약이었구나.

이건 주목 받을 일도, 창피함도 아니었구나. 그저 누구나 겪는 일상일 뿐.

 

브뤼겔 '눈 속의 사냥꾼들' (빈 미술사 박물관)

그러고보면 이 나라, 참 자유롭다.

체면과 허식이란 것이 만연하지 않다. 남의 이목에 목매지 않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어느 새 겨울이다.

지난 주까지는 포근하더니, 지금껏 겨울답지 않았던 기온이 아쉬운 듯 그제부터 부쩍 춥다.

참다운 자유가 공기에까지 묻어있는 이 나라.

에는 바람이 빰을 건드리고 가는 이 계절엔 그래도 가끔 그립다.

남에게서 그다지 자유롭지도 못한 내 나라가, 마음 붙이고 지내던 내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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