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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쉼표 아닌 쉼표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 (빈 미술사 박물관)

'아까 서울로 전화를 했더니.'하면서 시작되는 큰밥돌의 말.

'왜, 무슨 일 있대?' ' OO가 힘든가 봐, 농담처럼 비엔나로 좀 불러달라네.'

'우와, 그럼 잘 됐다. 내가 서울로 가고, OO가 비엔나로 와서 밥 하면 되겠네~'

 

다시 요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행 다녀온 지 시간이 좀 흘렀거나 해가 지나치게 일찍 떨어지거나 몇날 며칠 날씨가 비실거리거나 많아진 집 안 일

때문에 버틸 수 없을 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증세다. 귀찮고 짜증스럽고 삶이 싫어진다.

 

해 짧은 요즘 같은 때에 새벽 5시 반에 일어나는 것은 분명 힘에 부친다.

새벽부터 밥상 차리고 도시락과 간식 챙겨주는 것도 힘겹다. 아이 등하교 시키는 것도, 공부 봐주는 것도 쉽지 않다.

 

서울 살 때는 결혼 후에도 12년이나 직장생활을 지속했었다.

직장 생활에 쉼표를 찍으며 남의 나라로 떠나올 때 건네던 동료들의 부러움 섞인 말들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시적인 휴식이었기에 더욱 매력적이었고 다시 돌아갈 자리가 있었기에 여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끔씩 가사가 주는 중압감과 무력감은 날 지치게 만든다.

 

전업 주부인 한 친구가 예전에 했던 말.

'집에 있는 것도 힘들어, 몸보다 정신적으로.' 그땐 그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직장과 육아와 가사를 거의 혼자 해내며 정신없이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기에.

내가 처한 상황 말고 다른 형편에 눈 돌릴 겨를이 없었기에.

 

외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주는 일들엔 이젠 초월해질 수 있다.

문화적인 이질감, 인종에 대한 가끔의 편견, 절친한 사람들의 부재 등엔 익숙해져서 불편함은 없다.

그러나, 직장생활보다 더 지치는 하루하루, 가끔씩 잊혀지는 '나'라는 존재.

자아에 대한 무거운 상실감에 가슴이 저리다.

나를 확인할 길 없는 서글픈 상황에는 해방구가 보이지 않는다.

 

며칠 간 눈비가 이어지더니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하늘이 맑다.

심연 같은, 바보 같은 상념에서 얼른 벗어나야겠다. 나를 위해서.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파이드라 (빈 미술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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