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커튼을 제치고 베란다에 나가보니 새벽 어둠이 가시지 않은 하늘엔 보름달만 둥그렇게 떠 있다.
호텔 뒤편에 위치한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집 대부분은 아직 점등 전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형 인간이라 해야 할까. 아침 시작이 늦고 저녁 마무리도 늦다.
7시 40분, 아침식사를 하러간 호텔 식당 안에 사람 그림자가 없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가 되어서야 음악이 나오는 걸 보니, 스페인의 저녁형인간 규칙을 무시하고 우리가 너무 일렀나.
외출 준비를 하러 다시 객실로 들어오자마자 작은밥돌이 텔레비전을 켠다.
TV에선 스페인어 더빙을 덧댄 만화영화 '피카추'가 방영 중.
어젠 '못 말리는 짱구'를 전송해주더니만, 스페인의 TV만화도 절대적으로 일본만화 판이다.
서울의 가을처럼 하늘이 높푸르다.
우선 지하철을 타고 몬세라트 행 기차가 출발하는 L'Hospitalet역까지 움직였다.
역 입구에 설치된 자동발권기 앞을 왔다갔다하던 직원이 친절하게도 티켓 발권을 도와준다.
우린 몬세라트역까지 가는 FGC(기차)와 다시 몬세라트역에서 수도원까지 갈 수 있는 까라마예라(산악열차),
이 둘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구입했다.
몬세라트 수도원 행 산악열차 밖으로 거대한 화강암 병풍이 지나간다.
구름에 싸인 화강암 앞편으로 보일듯 말듯 널찍하게 자리 잡은 것이 몬세라트 수도원인 듯했다.
바르셀로나 북서쪽에 위치한 몬세라트 수도원은 1,229m 고지대에 터를 잡고 있으며, 베네딕트수도회 수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9세기에 처음 외부에 알려졌는데, 1811년 프랑스의 침공을 받아 파괴되었던 것을 재건했다고 한다.
청명한 하늘과 웅장한 풍광이 어우러져 장엄하고도 신비한 느낌을 자아낸다.
수도원 성당으로 가는 쪽의 반대편에, 승합차 앞에서 치즈와 꿀을 판매하는 상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몬세라트의 치즈와 꿀은 초창기엔 수도원 수사들이 만들기 시작했다는데, 지금처럼 여행객이 몰리고 수요가 많아진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수도원과 사진 속 치즈는 별 상관이 없을 듯하다.
산악열차 역에서 가까운 곳들을 둘러본 후 이젠 성당으로 향한다.
아치형 문을 지나면 오른편엔 흰 조각상을 품은 크고 긴 건축물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가슴까지 트이게 한다.
12시가 채 안 된 시각, 성당에선 미사가 진행 중인지 800년 역사를 지닌 소년 성가대의 맑은 울림이 들려온다.
일요일 아닌 다른 날의 미사는 1시에 시작된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바뀌었나.
오래지 않아, 여러 명의 사제와 소년성가대원 그리고 수십의 사람들이 행렬을 지으며 성당 중앙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간다.
행렬 사이로 우리가 본 것은 어른의 것으로 볼 수 없는 작은 관이었다. 아, 장례 미사였구나.
성당 정문 오른편의 자그마한 문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입구엔 입장 시각이 적혀있는데, 마침 딱 그 시각이라 영문도 모른 채 대열에 일조를 한다.
곧 작은 문이 열리고 아주 느린 걸음들이 이어진다.
성당 오른쪽 모서리를 따라 이어진 통로 같은 그곳에선 막힌 창살 틈으로 성당 중앙 부분도 볼 수 있었고,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과 함께 몬세라트에서 발견된 검은 성모상이 보존되어 있었다.
성당을 나오면 이어지는 좁은 길.
가장자리 따라 자리한 바위엔 단아한 타일 장식이 부착되어 있고, 바위 앞 색색의 촛불에선 저마다의 소원을 태우고 있다.
점심을 먹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오는 기차 안.
아침 기차에서 보았던 중년의 소박한 일본인 부부가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고, 건너편 자리에는 다섯 아이의 재잘거림을
바라보는 스페인 부부의 평안함이 실려있다. 바르셀로나를 향하는 하늘은 여전히 푸르디푸르다.
< 2007. 12. 24 >
'탐사('04~08) > 남유럽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페인 4 : 포트벨에서 (0) | 2008.03.04 |
---|---|
스페인 3 : 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 (0) | 2008.02.26 |
스페인 1 : 가우디의 도시 (0) | 2008.02.06 |
이탈리아 5 : 피사 그리고 여름 바다 (0) | 2007.09.24 |
이탈리아 4 : 아주 특별한 시에나 (0) | 2007.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