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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스페인 3 : 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

몬세라트에서 바르셀로나로 되돌아온 시각은 해가 서녘으로 한참 기울었을 때였다.

역에서 내려 지하철을 다시 타고, 어제에 이어 가우디의 흔적을 찾아 구엘 공원으로 간다.

지하철에서부터 공원까지 가는 길의 경사가 만만치 않다 싶었는데, 우리를 구원하려 나타난 그것의 정체는...

 

어라, 야외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였다.

유럽 어느 도시에서도 보지 못했던 야외 에스컬레이터 타는 재미가 퍽이나 신난다.

앞서 타며 내게 손 흔드는 작은밥돌. 그런데 비가 오면 관리를 어찌한다지, 전기가 자동 차단되나. 

 

구엘 공원은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이 투자하여 가우디의 설계로 언덕 위에 세운 공원으로, 20세기초에 완성된 공간이다. 

우리가 입장한 방향은 공원의 후문 쪽이었는데 공원에 발을 딛자마자 첫인사를 나눠준 것은 세상에나, 낙서투성이 아니, 

상처투성이의 선인장들이었다. 사람들이 선인장 이파리들을 얼마나 긁어댔는지 말라죽어가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저리도 쌀쌀맞은 방법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사람들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구엘 공원

돌 제단처럼 보이는 곳을 지나, 그저 평범하기만 산책길을 한참 걷는다. 뭐지, 왜 안 없지, 이쪽이 아닌가.

그럴 즈음 다다르게 된 넓은 공간, 구엘공원도 역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돌벽의 작은 부분은 물론 계단 하나하나까지 독특한 매력이 한없이 발산한다.

 

구엘 공원

음, 여긴 무조건 앉아봐야 해, 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거든.

타일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긴 벤치가 넓은 공간의 가장자리를 쭉 두르며 일체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긴 벤치 각 부분의 모양이나 색깔이 모두 다름은 물론이다.

벤치 하나를 만드는데도 얼마나 섬세한 정성을 기울였는지 가우디의 진정한 예술 정신이 참으로 대단하다.

 

구엘 공원

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 아래쪽엔 90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공간이 있다.

쇼핑홀로 설계된 이곳은 시장으로도 이용된다고 하는데, 크리스마스 전날의 그곳은 기타 연주만이 빈 공간의 울림을 더해준다.

 

구엘 공원

그래, 이 녀석이었구나. 쇼핑홀 공간을 나오니, 구엘공원의 모델인 타일 모자이크 도마뱀이 입을 벌리고 있다.

바로 이곳이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구엘공원의 정문이었던 것이다.

정문 앞 기념품점에도 독특한 것들이 많았는데 가장 눈길을 확 잡아끄는 건 '소매치기 조심'이라고 쓰여진 푯말이다.

여행객이 많으니 소매치기들도 특수를 누리는 모양이다.

 

구엘 공원

구엘공원 정문에서 길 안내 푯말을 보니, 버스정류장은 600m, 지하철은 1,200m란다.

일단 그냥 거리 구경하며 걸어가보자고. 6시가 넘으니 거리는 어둑어둑해지고 때맞춰 등장해준 버스 정류장.

그러나 버스정류장의 버스노선 안내도는 암호처럼 알아보기가 어렵다.

큰밥돌은 정류장을 남의 일 보듯 지나치고, 얼굴 찌푸리며 버스노선 연구를 하고 있는 내게 작은밥돌 왈, 그냥 지하철 타죠.

 

지하철로 이른 호텔 옆 슈퍼마켓 안에 스페인 전통 햄인 하몽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하몽은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1-2년간 숙성시킨 것으로, 무더기로 매달려있는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정신없이

보고 있으려니, 슈퍼마켓 안에 있던 한 할머니가 작은밥돌에게 말을 건다.

할머니는 스페인어인지 카탈루냐어인지 모를 말을 계속 건네고 작은밥돌은 전혀 상황 정리가 안 되고.

 

옆에 있는 내가 한참을 보니 몸짓이며 손짓이 시간을 묻는 것 같다. 시계을 보여주니 그제서야 미소를 짓는 할머니~

밖에서 기다리던 큰밥돌은 모자의 쇼핑 시간이 길었던 이유를 묻고, 아차차, 깜빡, 주렁주렁 하몽 사진을 안 찍었다.

 

한국 사람은 역시 밥심이야.

호텔 객실에 딸린 작은 부엌에선 우리의 저녁 식탁에 오를 참치 김치찌개가 보글거린다.

작은밥돌이 응시한 저녁 TV에선 상상력 넘치는 만화 캐릭터들이 보글거린다.

우리의 크리스마스 이브도 즐겁게 한껏 보글거린다. 

 

 

< 2007. 12.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