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50분, 아침식사를 하러 간 호텔 식당이 굳게 닫혀 있다.
공휴일 조식시간은 8시부터라 했으니 우리가 쓸데없이 일찍 가긴 했다.
뭐, 별 수 없이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가 잠시 후 다시 들어간 식당엔 직원 말곤 아무도 없다.
그런데, 빵을 접시에 담고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았을 즈음, 갑자기 식당 안이 소란스러워진다.
아이 둘은 실내를 뛰어다니고 남녀 어른의 목소리는 중국인처럼 성량이 풍부하다.
수세미 머리에 슬리퍼와 낡은 체육복 차림, 게다가 그들이 가고 난 후 탁자에 수북히 남은 음식들.
여행을 하며 일본인들의 이런 행태를 보았던 건 처음이다.
아침 위장을 채웠으니 바쁠 것 있나, 오늘은 좀 천천히 움직여볼까.
9시반, 크리스마스 아침은 지하철도, 거리도 모두 평온하고 한산하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2006년 크리스마스날엔 버스도, 지하철도, 기차까지도 몽땅 휴업인 도시에 있었다.
오늘은 람블라스 거리의 시작인 카탈루냐 광장부터 천천히 걸어간다.
람블라스는 아랍어 '냇물'에서 유래된 단어로 이 거리는 16세기부터 조성되었다고 한다.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그들의 역사가 거리 이름에까지 잔재해 있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람블라스 거리는 여행객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로 꽤나 활기를 띤다.
그렇지만, 람블라스 중간쯤에 자리잡은 바르셀로나 최대 규모인 보케리아 시장은 아쉽게도 휴점이다.
가우디의 첫작품인 독특한 형상의 가로등-사진에선 큰밥돌 뒷모습 위쪽에-이 있는 레이알 광장에 제대로 발을 들였으니
구시가인 고딕지구엔 헤매지 않고 들어온 셈이다.
화사한 아침 햇살을 받은 레이알 광장엔 남국다운 정취가 흠뻑 쏟아진다. 와, 멋진데~
어라, 나오라는 대성당은 아니 나오고 여긴 바다인가봐~
차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대로에서 짭조름한 내음이 풍겨나온다.
대성당 쪽이 아님엔 분명했고, 하늘을 향해 솟은 탑을 보니 가까운 저긴 파우 광장이다.
람블라스 거리의 남쪽 항구 가까이에 위치한 파우 광장엔 그 유명한 콜럼버스 기념탑이 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으며 동방에 대한 꿈을 지니게 되는데,
마르코폴로가 육로를 통해 2년 동안 간 길을, 콜럼버스는 바닷길로 한 달만에 동방에 닿을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콜럼버스가 예측한 지구 둘레는 실제 지구 둘레의 1/6-1/4 정도였고, 대서양보다 더 넓은
태평양이란 바다가 있을 것이란 짐작조차 할 수 없던 때였다.
이렇게 콜럼버스는 자신의 포부를 대항해시대의 강국인 포르투갈에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지만, 포르투갈은
이미 바다 항로를 개척한 상태라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상심한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가서 그의 계획을 밝히고,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제안을 수락한다.
1492년, 3척의 배로 스페인을 출발한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를 한지 2개월도 못 되어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데,
그가 '인도'로 굳게 믿었던 이곳은 오래지 않은 후일, 신대륙으로 밝혀진다.
포트벨 항구가 시끌벅적하다.
항구에선 행사가 열리는 듯 시민들과 여행객은 물론 경찰과 인명구조대까지 총 출동이다.
산타할아버지를 따르는 여러 루돌프들은 따뜻한 날씨에 옷을 훌러덩 벗어버리고, 즐거운 퍼포먼스를 만들며
사람들 사이를 가볍게 달리고 있다. 아마도 행사인 수영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같지~
이젠 정말 제대로 고딕지구로 들어섰다.
괜찮아보이는 카페에서 1.6유로짜리 맛있는 카푸치노를 즐긴 다음, 좁은 골목길을 돌아돌아 대성당을 찾아간다.
그런데, 어느 골목에 닿았을 즈음, 울려퍼지는 묘한 소리.
타악기 연주임엔 분명한 것 같은데, 아직껏 한번도 본 적 없는 악기 앞에서 우린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오호, 젊은 여자가 주저앉아 두드리고 있는 그것은 5-6군데 홈이 패인 대형 솥뚜껑(?)이었던 것이다.
미묘하고 잔잔한 리듬에 잠시 열중해있는 사이, 알콜 냄새가 옆을 확 스친다.
아침부터 신나게 술을 푼 남자, 신고 있던 플라스틱 슬리퍼를 벗어놓곤 사이비 종교의 몸짓처럼 정신없이 온몸을 흔든다.
길지 않은 춤사위를 마친 알콜향 남자는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진다.
크리스마스라 대성당 입구와 출구는 완전히 열려있고, 안팎의 인파는 말도 못하게 많다.
외관은 공사 중이라 천막이 감싸고 있지만, 늘 그렇듯 고딕 양식의 성당은 웅장함과 안정감을 준다.
곧 미사가 시작되려는지 여행객들을 성당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한다.
성당 앞 계단에서는 할아버지 악단이 가벼우면서도 템포 빠르지 않은 춤곡을 연주하고, 그 앞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연주에 맞춰 율동을 하며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다.
파란 하늘과 따스한 햇살, 맑은 미소가 어우러지는 한낮의 야외 무도회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있다.
작은밥돌아, 점심을 먹으러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딱 하나 남았거든.
어렵지 않게 찾은 그곳은 '왕의 광장'으로, 콜럼버스가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이사벨 여왕을 알현한 곳이라 한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연인 한 쌍이 앉아있는 저 계단이 바로 신대륙-실은 인도- 발견의 기쁨을 여왕에게 처음 전한 자리다.
허름한 차림의 악사가 튕기는 처량한 기타 소리가 푸른 하늘과 구슬픈 대조를 이룬다.
호텔로 돌아와, 객실에 딸린 부엌에서 라면을 끓였다.
우리 셋이 탁자에 붙어앉아 라면 4개를 해치운 건 정말 처음이다. 꿀맛이 따로 없다.
한참을 자고 쉬고 놀다가 다시 호텔을 나섰다. 어느 새 4시가 넘어가고 있다.
스페인 어느 도시에나 있는 에스파냐 광장은 호텔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고, 에스파냐 광장 바로 옆엔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의 마라톤 코스 중 일부였던 몬주익 언덕이 있다.
에스파냐 광장에서 바라몬 몬주익 언덕 초입엔 화려하고 섬세한 외관의 카탈루냐 미술관이 여행객을 반겨준다.
에고, 저기까지 거리가 장난이 아닌데, 어찌 가냐고~
다행히 구엘 공원 가는 길처럼 군데군데 설치된 야외 에스컬레이터가 우리 다리를 행복하게 한다.
몬주익의 환상 분수쇼는 겨울이라 정해진 요일에만 한다니, 가만 있는 둥그런 분수대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다.
카탈루냐 미술관 너머엔 올림픽 기념 조형물과 올림픽 경기장이 희미한 노을 속에 비친다.
저 한참 너머에선 지중해가 보인다던데, 바다 보러 가기엔 겨울 해가 짧기만 하다.
태양이 손길을 놓은 몬주익 언덕에 크리스마스의 훈풍이 날아다닌다.
< 2007. 12.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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