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길을 오르내리는데 할애한 시간은 30여분, 숙고하여 명상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나 보다.
통속적이게도, 산길(?)을 내려오자마자 대낮부터 시원한 맥주가 당겼으니 말이다.
아니지, 우린 산책을 하며 맥주에 대한 확고하고도 훌륭한 영감을 떠올린 거다.
여행 전, 하이델베르크에서 어디 가서 뭘 먹을까를 고민하다 3곳의 식당을 골랐다.
먼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Roten Ochsen.
Hauptstrasse 217번지,영업은 11시 30분부터 14시까지 및 17시부터, 근데 일요일은 휴무다.
오늘이 일요일이니 점심 후보에선 어쩔 수 없이 탈락이다. 이곳을 꼭 가고자 했다면 토요일인 어제 저녁에 가야 했다.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그리고 Vetter.
카를테오도르 다리로 가는 길목인 Steingasse에 자리하여 오가다 쉽게 만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트립어드바이저 순위 11위,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오픈한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식당이다.
또, Vetter처럼 Steingasse에 위치한 Hackteufel이 있다.
Roten Ochsen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트립어드바이저 13위, 주말에도 오픈한다.
점심식사 장소로 낙점한 곳은 Vetter다.
수제 맥주도 맛있다는 평이고, 한국인에게도 유명한 곳이니 입맛에 맞을 걱정은 안 해도 될 듯.
실내 창가 자리에 앉아,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으니 우선 식사 겸 안주 하나와 맥주를 주문했다.
무르익은 식사 시간이 아닌데도, 어느 새 식당 내부와 바깥 테이블 모두 거의 만석이다.
맥주가 먼저 나오고 곧 겨자소스, 수제소시지, 감자, 사우어크라우트를 함께 올린 접시가 탁자 위에 놓였다.
소시지와 감자는 말하면 입아픈 맛이고 시큼새콤한 사우어크라우트 역시 육식을 즐기지 않는-소시지보다 감자나 샐러드를
선호하는- 내가 좋아하는 맥주 안주다. 그리고 이 Senf, 즉,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겨자소스는 정말 최고다.
소시지를 찍어먹을 때는 물론 튀기거나 구운 감자와 함께 먹어도 색다른 맛을 자아낸다.
바로 옆에서 어린 한국어도 들리고 젊은 한국어도 들린다.
맥주 한 잔으론 흥취 돋우기에 부족했던 남편은 흑맥주를 한 잔 추가했다. 한 모금 입을 대보니 흑맥주맛이 더 나은 듯.
Vetter를 나온 우린 마르크트 광장에서 멀지 않은 Rathaus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한다.
기온도, 습도도 높지 않고 아주 맑은 날이다.
함께 숙소로 들어왔다가는,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리셉션에 구입처를 물어보러 나갔던 남편이 꽤나 한참만에 돌아왔다.
다른 곳에 쓰기만 한다면 엄청난 존경을 받을만한, 시공을 가리지 않는 대단한 집념과 끈기다.
졸린 눈을 치켜뜨면서 아침에 받은 문자메시지에 대한 답장을 보냈다.
아침에, 예약한 파리아파트의 관리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었다.
3일 후-8월 9일-, 숙소에 몇시쯤 도착하는지, 왓츠업앱을 쓰는지 등을 묻는 질문이었다.
그 앱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고 도착 예정 시각은 알려주니 곧 내가 보낸 메시지를 그대로 복사한 답장이 날아왔다.
이거 뭐니, 누구지, 그러고보니 프랑스 번호가 아닌 것 같은데.
이거 혹시 피싱인가, waytostay 이용하는게 아니었어 하는 온갖 의심과 후회의 단어가 쏟아져 나왔다.
검색을 해보니 왓츠업앱을 이용해 해킹하는 인간들이 있다는데, 난 그 앱을 깔진 않았으니 해당사항 없이 다행이었다.
남편은 예약확인서에 기재된 아파트 주인의 연락처-아까와는 다른 번호-로 메시지를 다시 날리고, 상황을 일단락시켰다.
암튼 엄청나게 찜찜한 상황, 파리에서 정말 조심하자고.
또 낮잠을 잤나봐.
낮잠대마왕인 남편이야 그렇다치고 난 웬만해선 오수(午睡)에 빠지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여행만 하면 낮잠마왕이 돼버린다.
학생감옥에서 충격의 한글을 대하고 산길을 오르고 또 문자메시지 땜시 쇼를 한 게 꽤나 고단했나 보다.
낮그림자 늘어진 창 밖엔 아직 밤기운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는 듯했다.
환한 저녁. 라면과 우동을 챙겨먹은 후 구시가를 향해 33번 버스에 오른다.
구시가지엔 불빛이 점등되고 있었다.
Steingasse의 Vetter와 Hackteufel엔 맥주를 즐기고 도시를 즐기는 이들이 그득하다.
우린 하이델베르크성 야경이 올려다보이는 광장에 앉아 서늘한 바람 맞으며 낮게 읊조린다.
긴소매 옷 입고 오길 잘 했네... 길이 눈에 익으면 떠날 때가 되네, 그냥 여기서 살까...
현실과 비현실의 대화는 떠도는 빛이 되어 하이델베르크의 마지막 밤을 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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