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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3 코헴·낭시·스부·뷔부

9월 30일 (토) : 뜻밖의 낭시미술관

Musee Des Beaux Arts : 낭시 미술관

낭시 숙소는 장단점이 명확하다.

기차역에서 멀지 않고 구시가에 자리해서 접근성이 좋으며, 내부가 밝고 깔끔하며 식기와 소모품이 잘 갖춰져 있고 세탁기까지 있다.

위치나 시설에 비해 숙박비가 저렴한 대신 10평 정도의 작은 크기이고 무엇보다 침실 침대가 딱 더블-가로폭140cm-이라 좁다.

서울에선 두 슈퍼싱글을 붙여 넉넉히 사용하기 때문에, 낭시에 온 지 며칠 지났으나 좁은 침대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다.

 

좁은 침대에서 뒤척이다 7시반에 일어나 짜장과 오이무침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몸은 약간 찌뿌둥하지만 날씨도 쾌청하고 위장도 어제 저녁보다 훨씬 쾌청해졌다.

카라바조를 기품 있게 만나려면 낭시 미술관에 오프런을 해야 했기에 9시 55분, 기분좋게 숙소를 나섰다. 

 

카라바조, 수태고지(1610년) / 귀도 레니, 부활한 예수가 성모 앞에 나타남(1605-1606년)
피에르 파울 루벤스, 예수의 변용(1605)

10시에 입장한 미술관은 아주 한적했다.

스타니슬라스광장에 위치한 낭시 미술관은 1층과 2층은 중세부터 19세기까지의 회화가 전시되어 있고 0층 전시실엔 조각 작품과

현대 조형미술, 19-20세기 회화 및 동양-일본-미술 작품이 있으며 지하 1층엔 유리공예품 및 성과 요새의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다.

굳이 비엔나의 미술관에 비유하면 미술사박물관과 벨베데레와 MAK-응용미술관-이 같은 미술관에 함께 있는 셈이다. 

 

큰 기대를 안고 1층 전시실의 카라바조 그림부터 보러 간다.

이탈리아 화가인 카라바조는 바로크 시대을 연 테네브리즘의 거장이다.

천재 화가였으나 분노조절장애적 악마의 인성을 지닌 그는 뛰어난 실력 덕분에 죄를 짓고도 대주교들로부터 비호를 받았다.

하지만 살인까지 한 그는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어  30대 후반에 객사하고 만다.

 

햇빛이 쏟아지는 전시실에 걸린 카라바조의 그림은 '수태고지'다.

16-17세기에 활동한 카라바조 회화의 특징은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다.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한 생동감 넘치는 연극적인 장면이 그림에서 절절히 느껴져야 하는데 이 미술관은 전시실의 크고 긴 창문

-하늘하늘한, 투명에 가까운 흰 커튼이 쳐진-을 통해 온갖 빛이 다 들어와 그림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외벽과 맞닿은, 동쪽을 향한 회화 전시실에 햇빛이 그대로 투과되는 창이라니.

관람객의 감상에도 불편을 주지만, 무엇보다 최고의 그림이 훼손될 우려도 있을 것 같다.

한 전시실에 걸려있는 카라바조, 귀도 레니, 루벤스를 보기 위해서 빛을 피해 시선과 방향을 여러 번 바꿔야 했다. 

 

외젠 들라크루아, 낭시 전투 (1833)
구스타프 쿠르베, 여동생 초상화(1853)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 속에서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와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프 쿠르베의 그림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회화는 같은 전시실에 있는데, 여긴 창문 없는 안쪽이라 그림 감상하기가 좋다.

라파엘로 스승인 페루지노의 구도에서 라파엘로가 떠오르고, '피에타'는 한눈에 봐도 역동성 넘치는 틴토레토 그림이다. 

 

페루지노 : 세례 요한과 두 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자(1505)
조르조 바사리, 거룩한 삼위일체(1558) / 페데리코 주카로, 피에타(1570)

 

틴토레토, 피에타(1580)

미술관 안내서엔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많이 소개되고 있으나, 그 화가들 작품은 거의 하나씩만 소장하고 있는 것 같다.

카라바조, 귀도 레니, 페루지노, 틴토레토, 바사리, 반다이크, 들라크루아, 모네, 마네, 마티스, 피카소-출타 중- 등 들으면 알만한

화가들의 그림은 전시실에 단 1점씩만 있었다.

다만, 다작 화가인 루벤스 그림은 대작 1점과 작은 회화 2점이 있고 로댕의 조각 또는 소조가 두세 점 전시되어 있다.

 

사실 유명화가들의 그림이 많고 적고는 아무 상관없다.

불친절하게도, 이 귀한 작품 옆에 붙어있는 작품 제목과 설명이 오로지 프랑스어라는 게 아쉬울 뿐이다. 

 

안톤 반다이크, 성모자(1632)
카라바조, 수태고지(1610)

1, 2층 전시실을 쭉 관람하고 다시 돌아온 카라바조 전시실.

동향 창을 가진 전시실이라 아직 햇빛이 살아있으나 벽으로 붙어 그림을 보니 카라바조 회화의 마력이 살아난다.

이제 계단을 내려가 미술관 입구 안쪽의 0층 전시실로 걸음을 옮긴다.

 

0층 전시실 앞
에두아르 마네, 가을 (메리로랑의 초상화.1882)
모딜리아니, 금발의 여인(1918)

여긴 1, 2층 전시실보다 장르가 다양하고 복잡하다.

난해한 현대 조형물이 있고 19-20세기 회화가 있으며, 조각 작품과 동양미술 전시실도 있다.

클로드 모네의 인상주의 회화보다 사실주의 화가인 에밀 프리앙의 많은 그림들이 훨씬 더 공감되고 인상적이었다.

 

클로드 모네, 에트르타의 석양(1883)
에밀 프리앙, 사랑(1888)
0층 전시실

크지 않은 미술관, 2시간 30분 동안 여유롭고 감동적이라 정말 만족스러웠다.

낭시가 주는, 토요일 오전의 편안하고 다사로운 느긋함이 참 좋다.

 

미술관 앞에서 본 광장 그리고 맞은편 오페라하우스와 그랜드호텔

오늘 점심식사는 리조또 전문 레스토랑에서 하기로 했다.

구글 평점이 아주 좋은 식당이고 토요일이지만 예약을 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좌석이 남아있었고, 우리가 야외에 자리잡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만석이 되었다.

 

정말 맛있는 리조또
초콜릿무스와 커피

이 식당에선 메인 음식은 3가지 리조또만 제공하는데, 고기토핑과 버섯토핑 올린 식사를 각각 주문했다. 

그리고 매우 친절한 서버에게 '이 순간의 디저트'라 적혀있는 후식도 함께 요청했다.

아주 상쾌한 날, 리조또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완전 감탄하면서 야외에서 최고의 리조또를 음미했다.

바쁜 서버가 깜빡하는 바람에 좀 늦게 나왔으나 디저트인 초콜릿무스와 추가 주문한 커피까지 맛있는 시간을 즐겼다. 

 

제과점 우리할아버지빵

레스토랑 근처 제과점 앞에 잘 생긴 젊은 남자가 모자를 뒤집어놓은 채 앉아 동냥 중이다. 멀쩡한 입성인데 무슨 사연인지.

'우리 할아버지네 빵'이란 빵집 이름이 허물없고 친근하다고 생각했는데, 체인점인지 나중에 스트라스부르에서도 보았다.

 

에클레어와 바게트

'우리 할아버지네 빵'집에서 구입한 바게트는 서울 우리 동네 빵집 바게트와 많이 비슷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했다는 주인장이 만든 딱 그 바게트인데, 내 입엔 잘 맞지 않아서 한두 번밖에 먹지 않았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프랑스 바게트는 숙소 옆 빵집의 바게트이고 그 집 바게트는 내가 먹어본 최고의 바게트 중 하나다.

 

인적 없는 생떼브르성당은 토요일인 오늘도 닫혀있다.

날개달린사자, 천사, 독수리, 날개달린소-복음사가-로 표현된 청동 조형물만이 성당 앞을 지키고 있다.

 

생떼브르성당 앞 날개달린사자, 천사, 독수리, 날개달린소 조형물(복음사가인 마르코,마태오,요한,루카를 상징)
생떼브르성당 앞 날개달린사자, 천사 조형물

아침부터 열심히 걸었더니 허리와 다리가 아프다. 누워있다가 잠시 잠이 들었다.

요거트, 사과, 바게트, 에클레어로 저녁을 챙겨먹은 후엔 서울서 보던 드라마 '힙하게' 15회를 시청했다.

'눈이부시게' 작가가 쓴 드라마라서 기대치가 높았는데, 처음엔 흥미로웠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범죄서스펜스가 돼버려 실망스럽다.

 

유럽 도시들 중엔 매월 첫 일요일, 뮤지엄 무료 관람 혜택을 주는 경우가 많다.

낭시도 미리 알아보았으나 계속 정보 확인이 안되다가 조금 전에야 무료입장 가능한 박물관을 알게 되었다. 

낭시 미술관을 비롯해서 성(城), 식물원, 건축물, 아쿠아리움 등 몇몇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내일, 무료관람이라는 선물을 어찌 활용할까.

관람하고 싶은 성(城)들은 딱 10월부터 휴관이고 식물원은 관심이 없으며 아르누보 건축물은 내부관람이 그다지 내키지 않기에

최종적으로 낙점된 곳은 낭시 아쿠아리움이다. 

그리고 햇빛 비끼는 오후에 카라바조를 또 만나러 갈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