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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3 코헴·낭시·스부·뷔부

10월 6일 (금) : 알자스 마을, 오베르네

아침 7시, 숙소 앞 거리에 청소차가 지나가고 거실 창 밖 외벽 가로등은 여전히 밝다.

버섯과 호박, 계란과 김치만두를 듬뿍 넣은 잔치국수로 속을 탄탄히 한 후 커피와 달디단 초코칩쿠키까지 채우면 준비 완료.

오늘은 스트라스부르 근교 오베르네로 간다.

 

흐린 스트라스부르 하늘, 목적지 없는 사람처럼 천천히 움직여 9시 50분, 버스정류장에 이르렀다.

버스 출발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티켓 판매소에 들어가 매우 친절한 흑인여직원에게 버스 티켓-버스기사에게 구입가능-을 구입했다. 

기점이자 종점인 넓은 버스정류장 앞에 큰 쇼핑몰이 있는데, 빵집과 패스트푸드점과 마트 등이 입점된 0층만 살짝 둘러보았다. 

 

Place des Halles : 버스정류장(기점)
257번 버스 안
오베르네 행 257번 버스 안 : 어느 알자스 마을

10시 20분, 오베르네 가는 257번 버스가 출발한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남서쪽으로 26km 거리에 위치한 오베르네는 지금은 그랑테스트지역에 포함되고 과거엔 알자스주에 속했다.

알자스를 여행할 때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면서 콜마르와 주변 마을인 리크위르나 에기솅을 함께 당일치기도 둘러보는 경우가 많은데,

우린 콜마르를 이미 2017년 여름에 여행했기에 이번엔 콜마르에 다시 갈 계획이 없었다.

리크위르나 에기솅에 가고 싶은 마음이 살짜기 있긴 했으나 그곳들을 가려면 콜마르로 이동한 후 다시 버스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한 번거로움이 내키지 않아서 스트라스부르에서 한번에 이동 가능-기차로도 가능-한 알자스 마을인 오베르네를 당일 코스로 잡았다.

 

대형 버스에 승객이라고는 우리를 포함하여 7-8명이 전부다.

어느 새 푸르게 맑아진 하늘, 스트라스부르를 벗어난 버스는 알자스 지역의 작은 마을마다 모두 정차한다. 

마을엔 고풍스러운 목골가옥이 가득하고, 마을과 마을 사이 드넓은 밭엔 수확이 끝난 옥수수 줄기의 대열이 끝이 없다.

 

오베르네 기차역
오베르네 성벽

11시, 오베르네다. 버스에서 내려 기차역 앞을 지나 구시가 쪽으로 가다보면 초입에 자리잡은 성벽을 먼저 만난다.

14세기에 완공된 오베르네 성벽-요새-은 가로수를 따라 쭉 이어져 있는데, 원래 4개의 성문과 20개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오베르네 구시가

요새의 성문을 통과하면 사진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예쁜 구시가가 등장한다. 

성문을 들어서자마자 펼쳐지는 영화 세트장 같은 동네라니, 거리마다 눈에 드는 목골-하프팀버-건축물이 소박하면서도 아름답다. 

많이 알려진 다른 알자스 마을보다는 관광객의 손을 덜 탄 느낌이랄까, 번잡하지 않고 여유롭다.

 

시청사 앞 광장
시청사 앞 광장
시청사에 걸린 우크라니아 국기

유럽 어느 도시든 여행의 중심은 시청사와 성당이다.

시청 앞 광장은 시청사의 왼쪽 측면에 접해 있고 시청사 왼편엔 첨탑 지닌 종루와 아담한 성당이 있다.

광장엔 작은 분수와 벤치들이, 그 좌우엔 목골 가옥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오래된 건축물들이 조화롭게 마주하고 있다. 

시청사 벽면에 아주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우크라이나 국기 따라 방향을 바꾸면 시청사의 멋스러운 정면이 볼 수 있다.

 

시청사
시청사 출입문 : 자유, 평등, 박애
옛 우물과 시청사

오베르네 시청사의 중앙 출입문 앞엔 스트라스부르와 콜마르 시청사처럼 Liberté, E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박애)가 쓰여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이 정신을 망각한 채 멋대로 오역하는 악마들이 가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시청사 건너편엔 기품 있는 부조와 우아한 캐노피를 지닌 16세기 우물이 자리해 있다. 마치 정화수를 건네줄 사명이라도 띤 것처럼 말이다.

 

생피에르에폴성당

스트라스부르와 역사를 함께 한 이곳 알자스 마을에도 깊은 위로가 간절했나 보다.

거리에도 길목에도 소소한 집 앞에도, 절실하고 지극한 마음을 담은 십자가 조형물이 많다.

낮 12시 10분, 뭐 그리 요긴할 것 같진 않았으나 일단 들른 오베르네 인포메이션센터.

2시간이나 되는 긴 브레이크타임에 딱 걸려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다. 이 와중에 인포 건물이 아기자기하게 예쁘다.

 

인포메이션센터(왼쪽 건물)

구시가에서 약간 걸어들어간 마을 안쪽은 고요 그 자체다. 사진 찍는 여행객이라고는 우리 말고는 어쩌다 한둘.

우연히 지나게 된 패스트푸드 음식점-푸른별식당-의 구글 평점을 언급하는 남편, 4.8점이란다.

수수한 야외 자리에 앉아 치즈버거세트를 골랐다. 맛있고 든든하며 가성비 좋고 직원도 친절하니 더할나위 없는 곳이다.

 

구시가 북쪽의 드넓은 포도밭에서는 오베르네 마을을 전망할 수 있는데, 걷기에는 먼 그곳엔 관광용 꼬마기차로 갈 수 있다.

계단형으로 일구어진 포도밭 담벼락엔 알자스지방 성녀인 Odile오딜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져 있고 그 위쪽엔 십자가가 놓여있다.

이 오베르네의 포도밭은 알자스 와인가도 마을인 셀레스타, 리보빌레, 리크위르 등지로 이어진다고 한다.

오후 2시, 예상보다 요긴한 인포메이션 센터에 머물면서 오베르네와 알자스 관련 무료 리플릿을 챙겼다. 

 

Clos Sainte Odile

오베르네 구시가도 그러했지만 구시가를 벗어난 마을은 정말 평온하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알자스 마을이 이런 곳이었을까.

 

이 소설은 1871년 패전한 프랑스가 알자스를 프로이센으로 넘겨주게 되어, 학교에서 프랑스어교육을 하지 못하게 된 상황이 배경이다.

지각생 프란츠는 프랑스어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고,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에 참여하는 알자스 주민들은 비통해 한다.

프랑스어 교사인 아멜은 프랑스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언어라고 강변하고, 알자스인들에게 프랑스어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프랑스 만세'라 판서를 하며 소설은 끝난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그러나 '마지막 수업'은 심각하게 왜곡된 거울이다.

알자스가 독일에 합병된 1871년 이전, 알자스에서 프랑스어를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단 5% 정도였다고 한다.

예부터 프랑스령과 독일령을 오갔던 알자스는 주민 대부분이 독일계이고 알자스어-독일어 방언-를 사용했기에 프랑스령이었던 시기에도

프랑스어는 학교에 입학하고서야 접한 언어였다고 한다.

 

그런데 알퐁스 도데는 이런 현실을 멋대로 뒤집어, 프랑스어를 모르는 알자스인을 대상으로 프랑스어 교사가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는

장면을 설정했다. 알자스가 독일에 반환되어 이 지역 주민들은 일상 언어인 알자스어를 되찾고 독일 문화권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당시 알자스인들은 이를 슬퍼했을까, 기뻐했을까.

이 소설은 애국사상이나 민족의식과는 무관하다. 지독한 국수주의였던 작가가 지어낸 가상의 상황일 뿐이다. 

 

다시 오베르네 구시가. 카페인 충전이 필요하여 서정적인 카페의 야외에 앉았다.

그런데 주문 오류에 이어 탁자에 놓여진 커피는 종이필터 냄새 짙은, 세상에서 완전 제일 맛없는 커피다.

 

오베르네 기차역 근처 버스정류장에도 스트라스부르 가는 버스가 정차한다.

버스는 오후 3시 20분에 출발했고, 다음 정류장에선 하교한 초등학교 아이들 무리가 잔뜩 버스에 올랐다.

두세 정거장 후 아이들이 모두 하차하고 나니 버스 안은 다시 조용해진다.

 

오베르네 : 학교 앞 안전조형물
스트라스부르 숙소에서 본 거리

오후 4시 10분,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왔고 카르푸시티에 들러 푸딩, 레몬타르트, 적포도를 구입했다.

숙소 앞 빵집은 종일 바글바글하고 대기줄도 길다. 별 맛 없어보이는데 프티트프랑스 초입이라 입지 덕인가.

저녁 메뉴는 무와 감자를 넣은, 유럽 여행시 꼭 해먹는 대구필렛조림이다. 배신하지 않는 맛, 역시 맛있다.

 

저녁 7시반, 숙소 밖 거리에서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일까. 거실 창을 열어보니 사제, 수녀, 시민들이 숙연하게 촛불 행진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미국 언론에서는 민주주의가 실종된 대한민국을 대대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자유와 평등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무너진 현실에 화가 나고, 그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민중들이 너무나 부끄럽다.

불타는 금요일 밤, 옆 건물 0층 술집에선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전방위적 소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 소음에 묻혀 내 나라의 현실을 간곡히 날려버리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