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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4 베니스·로비니·비첸차

4월 9일 (화) : 카르미니에서 산타루치아까지

정신없이 놀다보니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여행 6일째다.

여전히 뒤척이고 몽롱한 아침, 즉석미역국과 짜장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9시, 숙소 앞 광장으로 나왔다.

산타마르게리타 광장 한쪽에 위치한 잡화점에서 폭 넓은 테이프를 구입했는데, 여행 첫날 깨져버린 캐리어 테이핑을 위한 것이다.

 

Majer
Majer

모닝커피를 마시러 간 곳은 숙소 근처 '주먹의 다리' 앞에 자리한 Majer.

내부와 외부에, 서서 마실 Bar 공간만 있는 빵집 Majer에서 주문한 카푸치노를 받아 나와 바깥쪽 바 위에 올려놓았다.

여행하면서 서서 마셔보는 커피-테이크아웃 말고-는 처음인 듯한데, 거리엔 지나가는 여행객들과 학생들이 참 많다.

 

스콜라그란데 데이 카르미니
산타마리아 데이 카르미니 성당 앞
산타마리아 데이 카르미니 성당

살짝 흐린 아침, 산타마르게리타광장의 끄트머리를 지나면 좁은 길목에 스콜라그란데 데이 카르미니가 있다.

명칭으로 추측하건대 이곳도 스콜라그란데 디 산로코나 스콜라그란데 디 산마르코처럼 베네치아 카톨릭교회 이 지역 교구 신도들의

친목 단체 건물이었던 듯해서 살펴보니, 규모는 산로코보다 작지만 외관엔 티에폴로 뮤지엄이라 쓰여있다. 

출입문엔 연주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고 입구에 들어서니 너무나 작고 소박한 티켓 창구만 있어서 바로 돌아나왔다. 

 

스콜라산로코처럼 스콜라카르미니 옆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산타마리아 데이 카르미니-델 카르멜-성당이 자리해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중앙제대 성화 그리고 신랑과 측랑 사이에 늘어선 기둥들의 부조와 그 위 성화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성당 안엔 우리 말고 1-2명만 머물고 있었는데 마치 다른 세계에 서 있는 느낌을 들었다.

 

산타마리아 데이 카르미니 성당
산타마리아 데이 카르미니 성당

오전 10시반, 다시 숙소로 들어와 남편 캐리어 바퀴 위쪽에 테이핑을 했다.

금 가듯 가로로 깨어진 캐리어에 테이핑을 하고 나서 보니 이동이 많지 않은 여행이라 귀국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산타마르게리타 광장

벌써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고, 산타마르게리타 광장의 야외 레스토랑에 앉았다.

산마르코 광장 버금가게 넓은 산타마르게리타 광장엔 야외좌석이 있는 레스토랑, 카페, 바 등이 여럿 있는데 우린 점찍어둔,

지극히 평이한 평점을 보여주는 두어 개의 식당 중 한 곳에 앉았다.

특별한 관광 포인트가 없는 지역이고 평일 낮이라 그런지 근처 다른 식당들처럼 이곳도 손님은 많지 않았다.

세트 메뉴 중 해물파스타와 칼라마리튀김-사이드는 각각 샐러드와 감자튀김-을 주문했는데, 지극히 평이한 맛이었다.

 

뱅크시 벽화
산타루치아 기차역

낮 1시, 오후의 첫 일정인 산타루치아역 근처에 있는 산티제레미아 에 루치아성당을 향해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시칠리아 귀족 출신 성녀 루치아는 순결 서언을 하고 결혼지참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으나 그녀의 약혼자는 날아간 지참금에

분개하여 루치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발-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때-한다.

루치아는 감옥에 갇혔고,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재판관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자 매음굴로 보내라고 판결한다.

그러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아 끌어낼 수도 없었고 화형시키려 하였으나 나무에 불이 붙지 않아서 결국은 참수되었다.

 

빛을 의미하는 Lux에서 유래한 이름의 성녀 루치아는 두 눈알이 뽑히는 고문까지도 받았으나 천사가 원상복구 시켜준다.

성녀 루치아는 한 손엔 종려나무 가지나 칼을,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두 눈알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산타루치아의 유해는 여러 도시로 옮겨다녔고 베네치아에선 현재의 기차역 자리에 있던 성당에 안치한 후 산타루치아 성당이라

명명했으나 지금은 성제레미아에루치아 성당에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산티제레미아 에 루치아 성당
테아트로 이탈리아(오른쪽)

좁은 골목과 소운하를 따라 산타루치아역 건너편에 다다랐고 대운하의 스칼치 다리를 건너 산티제레미아에루치아성당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당 문은 굳게 잠겨있고 몇몇 사람만 계단에 앉아있을 뿐 성당 앞 광장마저도 너무나 고요했다.

다행히 오후 1시부터 2시까지만 미오픈이었는데, 입장하려면 3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 일정을 바꾸기로 했다.

동쪽으로 400m쯤 이동하면, 옛날에 극장이었지만 지금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큰 마트인 Despar Teatro Italia를 만날 수 있다.

 

테아트로 이탈리아
테아트로 이탈리아
테아트로 이탈리아

2020년 1월, 선후배들과 베네치아에 왔을 때 숙소 근처에 있던 마트인데, 처음 보았을 때 큰 규모와 아름다운 내부에 깜짝 놀랐었다.

지금 숙소 근처 Conad보다 저렴하고 다양한 상품이 많으나 잔뜩 사들고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 할인 중인 딸기 한 팩만 구입했다.

 

Gheto게토 지역으로 들어가는 다리
게토
게토

테아트로 이탈리아에서 북서쪽으로 300m쯤 움직이면 Gheto게토가 있다.

주변에 있는 섬들에 비해 유난히 작은 섬이고 과거 유대인들의 강제 거주 지역이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층고 낮은 집들, 박물관, 카페 등이 베치돼있고 이탈리아어와 병기되거나 단독 명기된 이스라엘어가 많이 눈에 띄었다.

불투명하고 흐린 하늘처럼 마음이 흐려온다. 

 

산티제레미아 에 루치아 성당
산티제레미아 에 루치아 성당
산타루치아

그리고 다시 돌아온 산티제레미아에루치아 성당.

다채롭고 화려한 베네치아의 다른 성당들에 비해 소박하고 간결하며, 인적은 있으나 굉장히 조용하고 경건하다.

신념이란 과연 무얼까. 믿음의 귀결이 죽음일지라도, 굴욕적인 구명을 하지 않는 기백의 원천은 무얼까.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할 시간인가 보다. 무신론자인 나도 이곳에서만은 말이다.

 

산타루치아역 앞 대운하 : 스칼치 다리에서

오늘 베네치아 최고 기온은 21도임에도 많이 움직이니 덥다.

게다가 작년과는 달리 이번엔 베네치아 본섬의 수없이 많은 다리들을 오르내리기가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일까. 체력이 달리고 기력이 떨어지는 듯하더니 심한 체증으로 소화제까지 먹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도, 올초에 뒤늦게 정주행한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2회차를 시작했다.

여행처럼 재미와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니 멈출 수가 없다.

베네치아에서의 즐거운 시간도 쉼없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