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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4 베니스·로비니·비첸차

4월 18일 (목) : 머나먼 비첸차

새벽 취침으로 유난히 기상이 힘든, 로비니를 떠나야 하는 아침이다.

냉장고에 있는 계란과 야채를 다 털어 간단 식사를 한 후, 남은 곡물식빵으로 점심이 돼줄 치즈토스트를 만들었다.

캐리어를 다 꾸리고 로비니 바다를 한번 더 둘러보려 9시반, 밖으로 향했다.

 

로비니에서의 마지막 아침, 구름이 하늘을 잔뜩 뒤덮고 있다.

눈부신 일출을 보았던 남동쪽 바다는 흐린 날에도 뷰포인트답게 아름다운 정경을 보여준다.

 

지난 일요일에 우리가 탔던 유람선엔 기대감을 한껏 안은 승객들이 승선 중이다.

저기 남쪽 포구엔 어부들이 작업하는 어선 몇 척이 있는데, 셀 수 없는 갈매기떼가 어선 주변을 뱅뱅 날고 있다.

10시가 안된 시각인데도 한국패키지 여행객을 비롯하여 현장학습 나온 고등학생들 그리고 백인실버패키지 여행객까지 다들 분주하다.

어제 한국인들이 잔뜩 앉아있던 그 카페-우리 숙소 근처-에 다른 한국인들이 또 많이 있는 걸 보니 현지가이드 추천 카페인가보다.

 

오늘 긴 이동을 버티기 위해선 먹거리가 더 필요했기에 공사장 앞 콘줌에 들러 슈크림빵과 바나나를 구입했다. 

원래 체크아웃은 10시인데, 체크인시 1시간 늦게 late 체크아웃 요청을 한 덕분에 오전 11시, 셀프체크아웃을 했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베네치아에서 서쪽으로 70km 떨어진 비첸차Vicenza이다.

직행으로 갈 수 있는 대중교통은 없고, 버스를 타고 베네치아 메스트레로 간 후 이탈리아 기차로 비첸차까지 이동해야 한다. 

플릭스버스는 로비니에서 12시 45분에 출발하니 그때까지 1시간반 동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예정이다.

 

로비니 버스터미널 앞 카페
카페에서 본 거리

불친절한 돌바닥 위로 캐리어를 끌고 다다른 버스터미널 근처, 근데 이게 웬일, 카페마다 빈 자리가 없다.

캐리어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여러 카페를 오가며 빈 좌석을 알아보는데, 한 카페에서 두 할머니가 동시에 나를 향해 손짓을 한다.

완전히 빈 테이블은 없었으나 다행히도 감사하게도 혼자 낮술 중인 할아버지 테이블에 합석할 수 있었다.

주문한 카푸치노는 가격도 착하고 맛도 아주 좋았다.

 

카푸치노
로비니 버스터미널 앞 카페 : 한가해진 정오

플릭스버스는 로비니에 정시 도착했고 정시에 이곳을 떠난다.

우리의 두 캐리어는 로비니 오는 버스에서처럼 나란히 짐칸에 실은 다음, 두 손잡이에 와이어와 자물쇠를 채웠다.

베네치아까지 가는 길, 맑다가 흐리다가 비오다가 다시 개는 등 변덕이 춤을 춘다.

 

베네치아 메스트레행 플릭스버스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국경

오후 1시 50분, 크로아티아에서 슬로베니아로 들어가는 국경에서 슬로베니아 경찰이 버스에 탑승하여 승객들의 여권을 검사했다.

오후 2시 40분, 슬로베니아에서 이탈리아 들어가는 국경에서 다시 이탈리아 경찰이 버스에 오르더니 여권을 확인한다.

 

베네치아에서 로비니 도착할 때보다, 로비니에서 출발할 때 20분 더 소요되는 버스 운행 시각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슬로베니아 들어갈 때와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입국할 때는 여권 검사를 안하지만, 그 반대 방향으로 입국시엔

승객들의 여권 확인 과정-더 강한 국가(?)로 들어갈 때만-이 있으니 운행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경찰이, 버스 안 유일한 동양인인 우리 여권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가져가서 확인한 후 돌려주겠다고 한다.

여행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딱 봐도 여행객이고 쉥겐지역 입국일도 정확히 찍혀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기분 나쁘게시리.

이탈리아 경찰은 여권 파워 세계 2위 국가를 뭘로 보고 저러한 행동을 할까. 차별이라도 하는 걸까.

 

하긴 2년 동안 우리나라엔 꼴도 안되고 말도 안되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났고, 국격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실추되고 저급해졌는지

그래서 대한민국 수준이 얼마나 우스워졌는지 저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2-3분 후 여권은 우리 손에 돌아왔으나 정말 기분이 안 좋았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항구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이탈리아 국경에 들어서자 오스트리아가 공들였던 항구도시 트리에스테에 곧 이르렀다.

트리에스테는 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영토로 넘어갔고 오스트리아는 이후 바다도, 항구도 없는 내륙국가가 되었다.

 

4시간 40분 간의 긴 이동 후 베네치아 메스트레역 앞 플릭스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메스트레역에서 화장실-완전 깨끗. 당연 유료-에 들른 다음, 이딸로 직원의 호객을 마다하고 트렌이탈리아 티켓발매기로 오후 6시 23분

출발 티켓을 구매했다. 여행하면서 티켓을 현장 구매한 기차-승차전 스탬핑 필수-는 처음 탄다.

기차 티켓 현장 구매는 플릭스버스가 메스트레에 도착하는 시각을 무한 신뢰할 수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기차는 메스트레에서 파도바를 거쳐 33분만에 비첸차에 도착했는데, 퇴근 시각이라 역마다 내리는 승객도 타는 승객도 아주 많다.

 

비첸차 기차역에서 숙소까지는 650m, 공원과 광장을 지나 약속한 시각 맞춰 숙소에 안착했다. 

호스트 부부는 20분 넘게 긴 안내와 수다를 풀어놓았는데 이렇게 말 많은 호스트는 처음이다. 물론 호스트와 숙소 다 좋다.

짐을 다 풀고 오동통면을 잘 먹은 후 시뇨리 광장을 향해 구시가로 나갔다. 

 

이탈리아 비첸차
바실리카 팔라디아나 앞 팔리디오 조각상
바실리카 팔라디아나

오, 이 동네, 밝지 않은 가로등 아래 보이는 거리와 건축물이 정말 남다르고 심상치 않다.

게다가 밤의 시뇨리 광장과 바실리카 팔라디아나의 불빛을 마주한 순간, 감탄사가 쭉 이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온 도시에서 이런 자극과 충격은 흔치 않다. 엄청나고 대단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인 것이다.

 

시뇨리 광장
비사라탑과 바실리카 팔라디아나
바실리카 팔라디아나

포기할 수 없던 도시들, 로비니를 경험하고 비첸차를 만나기 위해 두 도시 사이의 이동을 기꺼이 감내한 우릴 스스로 칭찬해야 한다.

이곳은 여행 전 막연히 기대한 것보다 훨씬 멋지고 굉장한 세상인 것이다.  

 

로지아 카피타니아토
산빈첸초 성당(가운데)
날개 달린 사자(산마르코)와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살바토르문디) : 베네치아공화국 지배의 흔적

광장과 팔라디아나를 잠시만 후딱 보고 돌아오려 했으나 오후 9시부터 1시간 가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경 한 장면-사실 야경을 즐기지 않음-만 봤는데도 느낌이 다르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 기대되는 비첸차, 여기 정말 좋다.

종일 이동하느라 고단하지만 내일이 더욱 기다려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