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발걸음을 테베레강으로 옮겨 산탄젤로성과 산탄젤로다리를 바라보면서 비토리오에마누엘레다리를 건넌다.
그새 기온은 더 올라 그늘마저 시원하지 않은 시각, 여름 고온 때문인지 강물은 바싹 말라 녹조 현상까지 나타나 있다.
날씨만 좋다면야 천천히 거리를 산책하듯 걸어도 좋으련만, 긴 시간동안 야외를 걷기는 쉽지 않은 날씨다.
강을 건너 동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86년 도미치아노경기장으로 사용되었던 나보나 광장이다.
실외는 이미 너무 뜨거웠기에 우선 광장 앞 산타녜세인아고네성당으로 후다닥 들어갔으나 성당 내부마저 매우 덥다.
당대 최고 건축가인 보로미니가 설계한, 성녀 아녜스-아그네스-의 이름을 명명한 산타녜세인아고네의 돔 천장화가 환상적으로 멋지다.
성당 내부엔 화살형에도 살아난 강한 생명력-투석형 순교-의 몸짱 산세바스티아노-세바스찬, 세바스티아누스- 조각상이 놓인 제대도 있고,
성당명처럼 불길 위의 성 아녜스-아그네스-석상이 놓인 제대도 있다.
순결 서언을 한 아그네스에겐 로마병사가 옷을 벗기자 머리카락이 자라 몸을 가렸고 또 천사가 나타나 천상의 흰옷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나보나 광장에서 화형대에 올랐으나 불길은 아녜스를 피해갔고 결국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며, 성당 안에 그녀의 유해가 있다.
오전 10시, 다들 그늘에만 있을 뿐 나보나 광장을 오가는 인적이 드물다.
게다가 4대강 분수는 물론 포세이돈 분수까지 모조리 가림막까지 쳐놓고 공사 중-2025년 카톨릭 희년-이라 볼 것도 없다.
그 다음 행선지인, 광장 동쪽 산루이지데이프란체시성당에 이르니 입구에 7월 29일부터 8월 31일까지 휴업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며칠 전부터 구글에 휴업 안내가 있어서 좀 불안하긴 했으나 이렇게 계속 문을 닫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포폴로 광장에 위치한 포폴로 성당은 몇 달 전부터 휴업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나 프란체시마저 문을 닫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다.
포폴로 성당엔 카라바조의 그림 2점-베드로의 순교, 바울의 회심-이 있고, 프란체시 성당엔 콘타렐리 채플 전체가 카라바조 3부작
-마태오의 소명, 마태오와 천사, 마태오의 순교-으로 채워져 있다.
난 작년에 친구들과 여행하면서 두 곳에 소장된 카라바조의 그림을 모두 보았는데,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프란체시성당을
택할 것이기에, 포폴로 성당이 문을 닫았다해도 프란체시성당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기던 참이었는데 이를 어쩐담.
산루이지프란체시 성당은 프랑스왕으로서 성인으로 추앙된 루이 8세를 이름 붙인 프랑스 성당이다.
설마 근처에 위치한 산타고스티노성당은 안 닫혀있겠지, 이곳에도 바로크 천재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이 있다.
외관과 내부 모두 르네상스 양식을 담뿍 담고 있는 산타고스티노-성아우구스티누스-성당은 은은하고도 섬세하게 장식된 신랑과
강렬한 울트라마린 천장이 돋보이는 측랑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산타고스티노성당에 들어서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카라바조의 '로레타의 성모(순례자들의 성모)'다.
왼쪽 측랑 첫번째에 자리한 카발레티 채플의 제대화로, 안코나의 로레토에 있는 성모의집 대성당 '성모의 집'을 소재삼아 그렸다.
그림에서 '로레토 성모의 집'에 성지 순례 온 순례자들을, 시공을 넘어 성모자가 문을 열고 나와 맞이하고 있다.
성모마리아가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순례자의 기도가 이루어짐을 뜻하며 남자는 의뢰인 에르메테 카발레티, 여자는 그의 어머니 얼굴이다.
이 그림은 여러 논란을 일으키는데, 순례자들은 더러운 맨발 상태로 등장하고 성모의 집은 수수함이 지나쳐 초라하기까지 하며
성모마리아는 옅은 후광만 있을 뿐 지극히 평범한 아기엄마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모마리아는 카라바조가 사랑한 매춘부 막달레나 안토네티의 얼굴을, 아기예수는 그녀의 혼외자식을 모델 삼아 그렸다.
이후 막달레나 안토네티는 카라바조가 그린 '성모자와 성 안나-보르게세미술관-'에서 또다시 모델로 등장한다.
신랑 중앙 기둥에는 구약 예언자들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 세번째에는 1512년 라파엘로가 그린 예언자 이사야 프레스코화가 있다.
카라바조 제대화 앞 첫번째 기둥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이자 세례요한의 아버지인 자카리아-사가랴-를 그린 프레스코화도 있다.
오전 10시 40분, 고대로마의 만신전인 판테온 옆에 불덩이들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현대 이탈리아 로마에서 내내 무료입장 유적이었던 판테온은 2023년 7월부터 유료화되었다고 한다.
작년 봄을 포함하여 수없이 들어가 보았으니 이번엔 당연히 패스-무료라 해도 폭염 때문에 입장하지 않았을듯-다.
판테온 곁에는 산타마리아소프라미네르바 성당이 자리해 있다.
이 성당은 미네르바-아테나-신전 위에 세워진 것으로 잘못 알려져서 이렇게 길고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성당 앞 광장엔 오벨리스크와 코끼리 석상이 있는데, 이집트 이시스 신전에서 옮겨온 오벨리스크는 로마의 오벨리스크 중 가장 작으며,
오벨리스크를 장식하고 있는 코끼리 조각상은 주문 받은 베르니니 대신 그의 제자가 제작했다고 한다.
이 독특한 작품의 받침대에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코끼리가 운반하는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이집트의 지혜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굳건한 지혜를 전하기 위한 강인한 마음임을 인지하라' 는 라틴어가 쓰여있다.
신랑 천장이 울트라마린 빛깔로 장식된 산타마리아소프라미네르바성당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내부 규모가 상당히 컸다.
중앙 제대 아래엔 성녀 카타리나-시에나-의 유해가 있고, 내부에 베아토 안젤리코의 유해도 있다 하는데 기운이 달려서 찾을 수가 없다.
실외는 물론이거니와 실내 공간인 성당들도 열기를 잔뜩 품고 있다보니 성당 내부를 살펴보는 일이 힘겹기만 하다.
중앙 제대 왼쪽 기둥에는 미켈란젤로의 '부활한 그리스도'가 있는데 예수의 몸을 가린 청동천은 훗날 다른 이에 의해 제작되었다.
성당 내부의 여러 채플 중 시선이 확 닿은 곳은 카라파 예배당으로, 필리포 리피-보티첼리 스승-의 아들인 필리피노 리피가 장식했다.
정면 위쪽 프레스코화의 주제는 딱 봐도 '성모마리아의 승천'이다.
오전 11시 15분, 매우 후텁지근한 소프라미네르바성당 관람을 아주 대략 마쳤다.
우린 성당 앞 그늘 계단에 잠시 앉아, 마지막 일정인 산티냐치오성당은 물론 점심도 먹지 않고 바로 숙소에 가기로 결론지었다.
더이상 이 폭염 속에서 야외를 다니는 것은 중년의 체력과 건강에 절대적으로 무리였기 때문이다.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숙소 행 버스를 기다렸으나 구글맵의 안내와는 달리 도착 시간이 제멋대로다.
탈진한 나는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분을 섭취하면서 여유있게 다녀도 이런 폭염엔 장사가 없다.
숙소에 도착하여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누웠다. 손발이 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메슥거렸다.
열사병인가, 일사병인가. 자고 일어나서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으면 병원에 가야 할 터.
로마 폭염에 지쳐버린 남편도 라면만 끓여먹고는 낮잠에 빠졌다.
오후 5시에 울린 알람을 꺼버리고는 오후 6시 20분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약간의 요통만 느껴질 뿐 낮에 생긴 열사병인지 일사병인지, 처음 겪는 증상은 다행히 사라졌다.
오후 8시, 산타마리아마조레성당 근처를 지나 이 시각까지도 환히 불 켜진 동네 대형 마트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납작복숭아와 사과잼쿠키까지 다 챙겨먹고 나니 신기하게도 여행할 여력이 솟아난다.
내일은 보르게세 미술관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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