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스트리아에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작년 여름엔 여행이었고 지난 겨울의 방문은 생활에 대한 탐색이었으며, 올봄에 또 이곳에 온 이유는 살아가기 위해서다.
지난 겨울, 이곳의 종일 흐린 날씨와 예상할 수 없이 빠른 일몰 시간 때문에 난 거의 우울증에 걸릴 뻔했다.
시골이라 편의시설이나 문화시설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이라 같이 지내는 남편 친구 가족외엔 대화 상대도 없었다.
도저히 다니던 직장을 휴직하고, 와서 살고 싶은 마음이 깨알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기를 3주, 드디어 난 해법을 찾았다. 휴식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시간들을, 14년이란 긴 세월동안 집과 직장에 봉사해온 내게 주어진 선물로 여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남은 3주일 동안은 책을 읽으며 간간히 독일어 공부를 하면서 생활했었다.
지난 겨울의 방문은 그야말로 생활이었다. 부다페스트에 하루 다녀왔을 뿐 시골 마을에서의 긴 인내였다.
직장에 휴직계를 던지고, 다시 오스트리아에 온 것은 3월 중순이다.
남편은 2월 말에 먼저 이곳으로 왔고, 난 휴직 승인을 받은 뒤 남은 일들을 마무리한 후에야 아들과 함께 서울을 떠나왔다.
지금 사는 이곳의 지명은 운터슈팅켄브룬(Unterstinkenbrunn)이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부터 북쪽으로 50km 떨어져 있으며 체코 국경까지는 차로 20분도 걸리지 않는 곳.
마을 주민 수는 달랑 700여명이고 노인이 많다, 시골이니까.
우리 동사무소보다 작은, 시청 직원은 시장 포함하여 단 3명. 작은 슈퍼마켓, 실외수영장, 축구장이 마을 시설의 전부다.
아, 또 있다. M육가공 공장. 남편과 남편 친구가 운영하는 기업이다.
이 때문에 우리 가족이 전부 오스트리아에 왔고 또 이 시골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다.
울아들 기호는 만 9살이다. 3월 말부터 옆마을인 가우비치(Gaubitsch)의 초등학교엘 다닌다.
아직 독일어는 못 알아들어도 예체능활동 위주의 수업을 아주 즐거워한다.
아침엔 통학버스로 등교하고 방과후엔 통학버스나 승용차로 집에 온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지 둘쨋날,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하차를 잘못해서 엉뚱한 곳에서 내린 일이 있었다.
예상보다 늦은 귀가에 걱정이 쏟아지는데 예정보다 1시간이나 늦게 돌아온 기호.
버스를 잘못 내려서 걸어왔단다. 딱하고 속상한 마음에 가슴이 울컥하는데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는 기호.
그래도 금세 씩씩해졌고 요즘도 여전히 씩씩하다.
지금 사는 이 집은 시청 소유의 2층 건물이다.
30여년 전까지는 학교로 사용이 되었었고, 1-2년 전엔 개인병원으로 쓰였다고 한다.
1층의 작은 집은 우리 가족이 사용하고, 큰 집쪽은 남편 친구네-6명-가 쓴다.
저쪽 집에서 통하는 2층-굉장히 넓다-은 여러 용도로 사용되며 마당에선 가끔 신나는 그릴 파티가 벌어진다.
오스트리아의 식료품은 우리나라에 비해 비싸지 않다.
아니, 경제수준이나 국민소득을 헤아려 따져보면 오히려 이곳이 훨씬 더 저렴하다.
장보기는 중요한 행사다. 1주일에 2-3번 이웃 마을인 Laa(6km거리)에 가서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사곤 한다.
지난 겨울엔 헤매다녔지만 이곳에 다시 온 지 한 달이 지난 지금은, 무엇을 어디서 사야 하는지 감을 잡았다.
봄이라서 집 마당엔 개나리와 들꽃들이 한창이다.
다른 나무들도 저마다 잎새를 튀우며 푸른 봄을 드러낸다.
봄이 되면서는 맑은 날이 계속되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시골표 봄비가 부슬거리며 내 마음을 헤쳐놓는다.
그래도 시골에서 살아남으려는 내 의지는 어찌하지 못할 걸.
'탐사('04~08) > 빈에서 부친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흐린 날 (0) | 2005.06.09 |
---|---|
여름 단장 (0) | 2005.06.05 |
창가의 꽃 (0) | 2005.05.31 |
운터슈팅켄브룬 스케치 (0) | 2005.05.23 |
벌레와의 처절한 전투 (0) | 2005.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