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에서 폼페이까지 가는 방법은 둘. 국철을 이용할 수도 있고 사철을 타는 방법도 있다.
우리가 고른 철도는 사철. 호텔에서 가까우니까.
아침에도 이어지던 축포와 경적을 뒤로 한 채, 지하철처럼 한번씩 역에 멈추고 냉방까지 안 되는 사철에 몸 싣기를 40분.
화산재 속에 묻혔던 신비의 도시 폼페이가 눈앞에 있다.
폼페이는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 전체가 한순간에 화산재 속으로 묻혔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상업의 중심지였고, 모습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748년부터이며 현재 도시의 3/5정도가 드러나있다고 한다.
입구부터 드넓은 대지에 부서진 고대 유적들이 자리해 있다. 사라져 버렸던 도시 순례를 위해 지금부터 햇빛 제치고 전진~
처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기원전 2세기에 지어진 바실리카다. 법정이나 교역의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기원 전 6세기에 만든 아폴론 신전에는 아폴론 청동상과 함께 그의 누이인 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도 자리해 있다.
멀리, 건물들로 둘러싸인 고대 로마의 공공 광장인 포룸이 보인다.
그 곁을 돌아서면 남탕과 여탕은 물론 냉탕, 온탕까지도 구분되어 있던 공중목욕탕이 발길을 죈다.
일반 시민이 살던 집 내부 바닥 장식이다. 멧돼지를 비롯한 짐승들을 중심으로 갖가지 문양이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모퉁이를 돌면 아내 헤라에게 들켜 암소로 변신시키기도 했던, 제우스의 애인 이오 신전도 자그마하게 숨쉬고 있다.
어찌 이런 유적들이 1700년이나 재 속에 그대로 감춰져 있었을까. 보아도 보아도 너무나 신비로워 기막힐 지경이다.
로마인들의 즐거움 터, 대극장이다.
기원전 2세기에 지어진 이곳에선 음악과 춤을 곁들인 마임 공연이 행해졌으며, 입장 가능 인원이 5,0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햇살은 말할 수 없이 뜨겁고, 가슴은 형용할 수 없이 벅차다.
재에 묻힐 무렵의 폼페이는 현대 도시와 다를 바 없이 매우 발전되고 선진적인 도시였다고 한다.
요즘의 바와 비슷한 모양새의 레스토랑(혹은 술집)엔 고운 벽화도 채색되어있다.
폼페이가 화산재에 묻히는 순간, 도시의 정원 역할도 하던 포도밭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의 몸은 엄청난 화산재로 봉인되어버렸는데, 처절한 그들의 몸짓에서 당시의 공포와 고통이 느껴진다.
폼페이 유적지의 가장 안쪽엔 20,000명이나 수용할 정도의 규모를 가진 야외 원형경기장이 있다.
기원전 1세기에 세워졌으니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조금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다.
너무나 반가워 소리를 지르게 만든 그녀는 '비너스의 집'에서 자태를 뽐내는 아프로디테다.
우라노스의 피가 바다 위 거품으로 올라 조개 껍데기 위에서 탄생한 그녀가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 중일까. 거품 같은 섬, 퀴프로스로 가는 걸까.
거리 벽화에도 신들은 살아있었다. 제우스와 아폴론, 헤르메스도 긴 시간 넘어 현대를, 오늘을 지내고 있다.
옛날에도 실을 자아 옷감을 지었겠지~
원사 공장에서는 갖은 빛깔의 실을 짓고 세척하는 폼페이 사람들의 동작이 베수비오 화산과 겹친다.
사냥꾼이 살던 집엔 사냥 장면이 벽화로 남아있고, 폼페이 제일 가는 부자였던 1,000평 크기의 파우노 집은 궁전 같다.
2000년을 뛰어넘고 넘어 존재하는, 번영했던 그들의 고대 도시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어떤 생각을 안겨줄까.
그 옛날, 빵집 화덕에서 굽던 빵은 그들의 마음에도 따스한 양식이 되었을까.
경건한 순례자가 되어 고대를 걸었다. 더할 수 없는 신비함과 감탄의 연속...
뜨거운 오늘 햇살은 폼페이에 잠든 영혼을 위한 깊은 축복이고 위안이었다.
< 2006. 7.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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