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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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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에 입성하다 비엔나로 이사를 했다. 기호가 학교를 VIS (비엔나인터내셔널스쿨)로 옮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스트리아 시골 초등학교엘 1년 더 다닐 예정이었는데, 기회는 나타났을 때 쥐어야 하는 법. 달랑 남은 한 자리를 꿰어 차기로 했다. 학교를 옮기기로 결정 후 가장 큰 문제는 통학이었다. 운터슈팅켄브룬에서 VIS까지는 70여km. 승용차로 1시간 걸리는 거리다. 방법은 단 하나, 이사다. VIS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어있는 집을 급하게 구하고 8월 6일,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짐을 옮겼다. 지금 사는 곳은 도나우 강변에 자리한, 흔치 않은 31층짜리 아파트- 언뜻 보면 빌딩 같다-다. 맞은편엔 UN(UNO-CITY)이 있고 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되며 지하철도 코 앞. VIS까지는 지하철로 2정..
그리움들 정말 심심한 하루다. 더이상 표현할 수 없을만큼 심심하고 적막하다. 늘 집 안을 시끌벅적 활기있게 만들던 기호가 어제 오후부터 1주일짜리 캠프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 일요일 오후. 동양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낯선 캠프장에 기호를 들여보내고 돌리는 걸음이 얼마나 버거웠는지. 그런데, 인솔교사를 따라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며 기호가 던진 말은 달랑 "토요일 아침에 데리러 오세요."뿐. 기호는 아직 독일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라 우린 내내 걱정하며 마음이 어지러운데, 오늘 오후 전화 속 기호 목소리는 마냥 신나고 즐겁고 흥분된 음성이다. 같은 텐트에서 자는 오스트리아 친구들과도 친해진 눈치다. 기호 전화에 이제는 좀 마음이 놓인다. 그래도 이렇게 긴 시간동안 아이를 품에서 놓아둔 적이 없어서인지..
우리 낄라낄라 지금 만 9살인 기호가 만 4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어느 날, 느닷없는 질문을 한다. 엄마! 낄라낄라 알아요?, 뭣이라? 낄라? 괴상한 용어를 모르는 내 얼굴이 재미있었는지 연신 외쳐대었었다. 시껌둥이 낄라낄라~ 얼마 전부터 내가 지어준 기호 별명이 바로 낄라낄라다. 5월 말부터 집 뒤편에 있는 수영장엘 얼마나 들락거렸는지 피부가 구릿빛을 넘어 깜장색이 돼버렸다. 기호는 원래 수영장 가기를 무척 좋아한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약속을 하고는 방과후엔 시간에 늦을세라 재빨리 수영장으로 달려간다. 물론 약속 없이 가도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놀이터 같은 수영장이다. 풀에서 미끄럼틀도 타고 헤엄도 친다. 저렴한 입장료(1.5유로)에 맛있는 셈멜(오스트리아 전통빵, 1유로)까지 먹을 수 있기에..
운터슈팅켄브룬 스케치 3 지난 겨울, 처음 마을 이름을 들었을 때 뭐...하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독일어 알파벳도 읽을 줄 몰랐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운터는 아래, 슈팅켄은 냄새나는, 브룬은 샘. 자세한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지명을 머리에 남겼다. 작은 시골, 100년 된 낡은 집도 있고, 지은 지 오래지 않은 산뜻한 집도 많다. 놀랄 만한 것은 마을 인구의 상당 수가 노년층인데도 집 가꾸기에 열성이라는 것이다. 봄이면 페인트 칠을 하고, 정원 잔디도 깎아주며 꽃과 나무, 채소도 심는다. 토양이 좋아서인지 식물과 작물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시골 마을이라 울타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비엔나 부자 동네에 가봐도 높은 담장은 구경하기 힘들다. 집 빛깔들이 참 어여쁘다. 우리 아들의 제일 친한 친구인 벤하트의 집이다. 시골이라..
운터슈팅켄브룬 스케치 2 요즘 이곳 날씨는 꼭 늦가을 같다. 햇살 좋은 날이 별로 없고 바람 불고 흐리고, 거기다 춥기까지 하다. 아침엔 5도까지 내려앉고 낮기온은 15도안팎. 오늘도 서늘한 날이다. 어제 소풍을 다녀온 기호가 오늘은 학교엘 안 간단다. 소풍 다음날이라서 쉬나, 아이들 천국이다. 휴교일이 넘치게 많다. 기호와 함께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지나던 차에 탄 사람이 손을 흔든다. 아직 낯설다. 모르는 사람의 손짓도, 동양인이라서 받는 시선도. 마을 한가운데 있는 작은 분수대이다. 찬 날씨인데도 분수는 제 역할에 열심이다. 분수대 뒤편으론 공중전화 부스와 벤치, 그리고 누군가의 묘비가 있다. 우리 집 뒤쪽에 있는 유치원. 정오가 되면 엄마들이 차를 세우고 아이를 데려간다. 간혹 걸어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이 나라 사람들..
어떤 흐린 날 지난 주말부터 궂은 날씨의 연속이다. 날씨에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1주일이나 계속된 이국의 나쁜 일기가 아무렇지 않을 만큼 둥근 심성은 아닌가 보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 정신의 일기도 좋은 편이 아니다. 아침에 남편과 별것 아닌 신경전도 있었고, 요사이엔 뜸하던 개미와의 타이틀전-한 200마리 쯤-도 모질게 치렀다. 그것도 기호 등교 전에. 그러고 나니 공연히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따라 집에서 잘 쉬어주고 있는 승용차를 몰아 Laa로 갔다. 정말 뛰어봤자 벼룩이다. 이 나라 지리를 모르니 갈 데가 거기밖에 없다. 먼저 책과 음반, 문구를 파는 상점에 가서 본드와 그간 찍은 사진을 정리해 넣을 봉투를 샀다. 기호가 좋아하는 DVD를 하나 사려니 마땅한 게 눈에 띄지 않는다. 계산하면서 점원이 묻는다..
여름 단장 모처럼 집을 지키는 토요일 저녁이다. 남편은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앞집 아저씨와 함께 가출한 지 오래. 오늘은 아침부터 작심하고 안방 침대 위의 이불을 걷어냈다. 어제 Laa에서 새로 산 이불 커버로 바꾸기 위해서다. 이 나라에서 판매되는 이불 커버나 이불 속통(이불 솜)은 거의가 1인용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더블사이즈의 커버와 솜은 흔하지 않다. 새로 산 커버도 1인용 커버 두 개. 짙은 남색 커버와 오리털 속통을 들어내고 가벼운 커버와 속통을 덮어놓으니 꽤 여름 느낌이 난다. 오후부터 내리던 비가 아직도 떨어진다. 낮엔 1-2시간이면 제 역할을 다하던 비가 오늘은 지치도록 계속된다. 잠시 잊었던 우리나라 정서를 돋워내기 위한 것인지. 지금 쏟는 비는 꼭 우리나라 여름 장마 같..
창가의 꽃 5월 마지막 날. 지난 주 폭염이 미안했던지 오늘 오스트리아 날씨는 완전 정상이다. 지금은 다 회사와 학교에서 각자 임무에 충실한 평일 오전, 나 혼자 평화로운 때다. 방금 찍은 마당 사진엔 바람이 잔뜩 묻어있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한 채, 정원 나무 사이로 보이는 좁은 도로가 희미하다. 어제 일이다. 저녁 식사 후 두 남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시각에 어디 갈 데도 없는데. 한참 뒤 돌아온 남자들 손엔 마을 거리에 핀 꽃이 들려 있었다. "엄마를 위해 준비했어요"라는 기호. 유리컵에 꽂아 부엌 창가에 놓으니 쓸만한 분위기이다. 그런 뒤, 남편은 클림트 그림을 넣어둔 액자를, 오늘은 결단코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기호에게 망치를 구해오라는 특명을 준다. 재주 좋게 망치를 챙겨온 기호. 그림이 드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