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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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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에덴 그들의 나신이 사라진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가나보다. 적당하게 이쁜 우리 옆집, 격자 무늬가 난 주방 창문엔 조리 기구들이 오밀조밀 매달려 있고, 현관 앞 계단엔 꽃들이 그 자태를 한껏 뽐내는 집이다. 석 달 전 어느 오후, 화장실 갔던 큰밥돌이 난리가 났다. 옆집 할배가 태고적 몸 상태로 마당에 나와 있다나. 욕실과 분리되어 있는 우리 집 화장실은 옆집 마당의 최고 조망권이다. 후다다닥~ 거실에 있던 작은밥돌과 난 비좁은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최소한 손바닥만한 수영 팬티는 입었을 것이란 내 짐작은 여지없이 박살나 버렸다. 태초의 아담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따끈해진 5월 말부터 중년 부부의 에덴은 매일 계속되었다. 걸친 것 하나 없이 마당 의자에 누워 썬탠하는 일이나 코딱지만한 ..
사랑은 택시다 사랑은 택시다. 버스는 기다리면 오지만, 택시는 반드시 자기가 잡아야 하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엔 더 기다려진다. 또, 내릴 때는 반드시 탄 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타고 온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합승은 불법이다. - 가져온 글 - (합승은 불법, 맞네요.) 어제 오후, 저녁을 먹기 위해 베란다에 전기그릴을 펴는 순간, 난데없이 경찰 둘이 집 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여행 떠난 아래층 집에 용무가 있나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고개를 내밀었더니, 2층 우리집을 향해 무어라 내뱉는다. 마당으로 내려간 큰밥돌에게 던진 경찰의 첫 질문. "당신 총 있쓰?" 사연인즉, 어른 둘이 베란다에 있을 때 작은밥돌이 거실 창문으로 뒷집 마당 나무를 겨냥해서 장난감 권총을 발사했..
키스와 원수막 늦도록 이어지던 작은밥돌의 부활절 방학이 드디어 끝났다. 집보다는 학교가 즐겁다며, 열흘 만에 등교하는 오늘, 룰루랄라 신나게 교문에 들어선다. 하루종일 붙어있다보니 잔소리만 무한대로 증가하는 방학이, 내게도 녀석에게도 고문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 지난 주, 아래층 사는 인도아짐네는 방학과 휴가를 맞아 1주일간 프랑스인지 스위스인지로 부러운 여행을 떠나버렸고. 뭐, 그집은 그집이고, 우리도 나름대로 알맹이 있게 보내기 위해 미리 합의하에 방학 계획을 세웠었다. 오전엔 공부를 하고 오후엔 빈 탐험을 하기로 분명 약속을 했었는데, 막상 방학이 되니 움직이지 않으려고 버텨댄다. 요한슈트라우스가 살던 집에도 안 간다, 훈더트바써하우스에도 안 간다더니 프라터 공원은 흔쾌히 앞장을 선다. 프라터 공원은 드넓은 대지..
비엔나에서 이사하기 결혼 후만 헤아려 서울에서 12년을 생활하는 동안 집을 옮긴 것은 3차례. 그런데 오스트리아에 와서 거의 1년이 돼가는 지금, 벌써 3번째 집이다. 유럽 많은 나라들이 그렇겠지만, 오스트리아도 우리나라와 같은 포장이사는 아예 없고, 가물에 콩 나듯 있는 이삿짐센터의 이용요금 또한 어마어마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또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집을 옮긴다고 한다. 3번째 보금자리를 찾던 그날도 역시 우리 안에 내재되었던 힘과 주변의 도움만으로 새 둥지를 틀었다. 2월 25일 토요일. 아침부터 짐을 싣기 시작했고 승용차로 10분 거리인 새 집까지 두 대의 차(작은 트럭과 승용차)로 2번 실어 나르니 이사 끝. 살던 집과 이사할 집 모두 덩치 큰 가구들은 대부분 구비되어 있었기에 크게 고생하지 않았다. 또..
당신을 어떻게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방법을 꼽아볼게요.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만큼, 넓이만큼, 그 높이만큼 사랑합니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중- 비엔나의 겨울이 갑니다. 저도 겨울 따라 이번 주말에 갑니다. 이사~ 오스트리아 시골에서 5개월을 살았고, 지금 비엔나 집에선 6개월을 지냈네요. 작년 여름, 아이 학교 따라 급히 비엔나로 옮기느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곳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비상합니다. 좀더 자연적 모습을 띤 또다른 비엔나로 향하는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삿짐 싸고 옮기기. 우리나라처럼 편리한 이삿짐센터는 애초에 없기에 많은 양은 아니더라도 짐싸기가 만만치는 않을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준비해야 할 것 같네요. 짐도 여러 차례 실어 날라야겠죠. 전..
시청사 앞의 겨울 며칠 전, 빈 중심가를 승용차로 지나다가 화려한 불빛과 어우러진 모습이 재미있어 차창에 코 박고 구경한 곳이 있었다. 바로 빈 시청사 앞 스케이트장. 낮은 기온이긴 하지만, 스케이트 타기엔 그다지 나쁘지 않은 날씨이다. 오늘은 일요일 오후라 사람들로 정신없이 붐빈다. 스케이트 코스 안내판도 어엿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경쾌한 음악에 몸을 흔드는 사람들도 여기저기. 시청사 광장엔 계절마다 여러가지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요즘 같은 겨울엔 스케이트장과 스케이트 대여소, 음식점까지 마련되어 있어서 한 나절을 보내도 충분하다. 스케이트장 개장시간은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용 요금은 오후 4시를 기점으로 나누어지는데 4시 이후의 요금이 더 비싸다. 두 남자는 4시 이후 입장권에, 스케이트까지 빌려..
1월의 끝 지난 주, 한국인들의 작은 음악회가 있었다. 어느 대학 연주홀에서 잔잔하게 진행된, 가곡과 아리아 중심의 성악 콘서트였다. 사실 난, 유독 쇼팽만 좋아할 뿐, 성악이건 기악이건 클래식 음악에 별 관심이 없다. 게다가 작년 봄에 갔던 음악회에선 중간에 연주회장을 뛰쳐나온 전력도 있기에 이번 역시 비상의 경우까지 짐작하고 간 터. 시간이 임박하여 연주홀에 들어가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관객이 되어 자리하고 있다. 간혹 다른 나라 사람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나라 사람이다. 낯익은 분들과 손인사, 눈인사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시작 시간. 깔끔하게 정비된 무대에서 주인공과 반주자가 첫인사를 한다. 무대 주인공과는 아는 사이, 평상시의 화술과 농담은 사라지고 성악가로서만 무대를 채우고 있다. 잠시 후, ..
나에게 묻는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며칠 동안 쨍하게 내리쬐던 햇살엔 미동도 않던 내 마음이, 뿌옇게 흐린 오늘 같은 하늘 아래에선 염치없는 반응을 드러낸다. 어휴, 또 잿빛이군, 정말 으이그, 요즘 이런 식이다.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겨울 해도 얄밉고, 나를 남의 나라까지 밀고와 밥순이로 추락시킨 큰밥돌(남편)도 얄밉다. 요 며칠, 우유 쏟고 준비물 빼 먹고, 정신력 해이의 정석을 보여주는 작은밥돌마저 얄밉다. 몇 해 전, 10년이나 써온 가계부 10권을 쓰레기더미에 쏟아부은 일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썼던 일기를 결혼 후엔 가계부가 대신했기에 그것은 애환과 희망이 담겨있는 나의, 아니 우리들의 역사였다. 그 소중한 역사를 던져버린 이유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