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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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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 소프론의 하늘 분명, 여름 실종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8월이 이렇게 차가울 순 없다. 카디건을 걸치고 단추까지 꼭꼭 채우고서야 문을 나서야 했다. 이곳의 8월 15일도 우리나라처럼 늘 공휴일이다. 재미있고 신나는 우연. 그 우연을 핑계 삼아 국경을 넘었다. 소프론은 오스트리아 동쪽 국경에 닿아있는 헝가리의 작고 오래된 도시다. 소프론에 들어서자마자 영어와 독일어로 쓰인 치과 간판들이 눈에 띈다. 헝가리 국경 도시에는 저렴한 치과 치료를 받으려는 서유럽인들이 많다더니 정말인 듯 하다. 낡은 중심 광장엔 유럽 어디서나 자주 띄는 정경들이 드러난다. 기념탑이 있고, 성당이 있고, 야외 레스토랑이 있다. 작고 낡은 민속품 가게도 오도카니 광장 한 켠을 지키고 있다. 거리를 걷다 만난 어느 레스토랑. 600년 된 그곳의 와인은..
그들의 에덴 그들의 나신이 사라진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가나보다. 적당하게 이쁜 우리 옆집, 격자 무늬가 난 주방 창문엔 조리 기구들이 오밀조밀 매달려 있고, 현관 앞 계단엔 꽃들이 그 자태를 한껏 뽐내는 집이다. 석 달 전 어느 오후, 화장실 갔던 큰밥돌이 난리가 났다. 옆집 할배가 태고적 몸 상태로 마당에 나와 있다나. 욕실과 분리되어 있는 우리 집 화장실은 옆집 마당의 최고 조망권이다. 후다다닥~ 거실에 있던 작은밥돌과 난 비좁은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최소한 손바닥만한 수영 팬티는 입었을 것이란 내 짐작은 여지없이 박살나 버렸다. 태초의 아담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따끈해진 5월 말부터 중년 부부의 에덴은 매일 계속되었다. 걸친 것 하나 없이 마당 의자에 누워 썬탠하는 일이나 코딱지만한 ..
여름밤의 꿈, 필름 페스티벌 여름밤이면 늘 이곳에선 필름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초겨울엔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고 한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하는 곳. 빈 시청사 앞 광장의 여름은 형언할 수 없는 뜨거움 자체이다. 어둠이 찾아오는 시각에라야 대형 화면이 눈을 뜨지만, 클래식 연주와 오페라를 감상하려는 시민들의 열정은 늦지 않은 오후부터 이미 그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은다. 한길 쪽 광장엔 여러 나라 음식이 맛있는 향을 내고 시원하고 풍성한 맥주 거품은 우리 마음을 황제로 등극시킨다. 귀와 눈이 함께 행복한 화려한 축제~ 금세 밤이 들고 대형 화면에선 빈 필의 연주가 흐른다. 시민과 여행객이 즐겁게 어우러지는 축제는 이어지고, 자꾸만 귀를 솔깃하게 하는 곳곳의 젊은 한국 말. "사진 좀 찍어주실래요?" 요한 슈트라우스의 흥겨운 왈츠는 한없..
몬트제 스치기 뜨거운 7월 햇살은 살갗을 태우고 마음을 태우더니, 서늘한 8월 햇살은 가슴을 추억으로 그을리게 한다. 친구와 함께 걸었던 잘츠.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의 배경이 된 미라벨 정원. 정렬된 수많은 꽃들은 색색으로 아름답다. 잘츠부르크 비치발리볼 경기장을 장식하고 있는 근사한 젊음들. 잘츠부르크 너머 저편 잘츠카머구트의 몬트제 마을은 그 이름처럼 은은히 빛난다. (몬트는 달, 제는 호수~) '사운드오브뮤직' 트랩 대령과 마리아가 결혼식을 올렸던 성당에선 우리가 찾아갔던 그날도 아리따운 한 쌍이 탄생하는 중. 그림 같은 마을, 그림 같은 시간. 순간의 기억을 추억으로 만드는 마법 같은 곳. 가슴 설레게 하는 익숙한 갈망과 함께 여전히 나를 안고 도는 몸살. 8월초의 서늘한 바람과 기온이, 질겼던 7월 햇살을 ..
이탈리아 7 : 귀로 이탈리아 여행 마지막 날~ 어제처럼, 진한 에스프레소와 함께 아침을 열였다. 저 건너편엘 가볼까. 일요일이라 미사가 한창인 성당, 낡은 겉모습과는 달리 화려하고 섬세한 내부에 깜짝 놀랐다. 두 번이나 찾아갔던 맛있는 피자 가게~ 어제 저녁엔 긴 줄의 사람들 틈에 끼어 피자를 받아왔다. 차오 하며 반갑게 맞아주던 젊은 이탈리아 주인이 떠오른다. 다른 성당에서도 미사는 이어지고 있고 집집마다 걸려있는 이탈리아 국기의 물결, 그 틈으로 보이는 이탈리아 빨래의 물결~ 낡은 건물의 출입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지만, 나폴리 바다와 소렌토 바다는 활짝 펼쳐져 있었지. 여전히 요란한 로마를 거쳐 다시 비엔나로 돌아왔다. 베란다에 새로 심은 패추니아가 부쩍 자라있다. 인생도, 가슴도 저 꽃처럼 부쩍부쩍 자라기를. < 20..
이탈리아 6 : 소렌토 내음 폼페이를 나와 폼페이를 바라보며 야외 카페에 앉았다.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바닥만 보며 따라다니던 작은밥돌 얼굴이 그제서야 펴진다. 발을 보니 먼지가 얼마나 쌓였는지 까마귀 사촌이 되어버렸는데, 밥때 놓치기 일쑤인 이번 여행, 오늘 점심도 예외 없다. 폼페이에서 소렌토까지는 사철로 30분 거리.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 상쾌한 바닷 바람. 소렌토 출신 시인 이름을 딴 타소 광장에서 보이는 푸르른 바다. 얼른 늦은 점심을 먹고 바다로 향한다. 서민적인 나폴리보다 소렌토는 휴양지 느낌이 많이 난다. 로마와 나폴리보다 훨씬 덜 시끄럽고 덜 뜨겁고 덜 지저분하다. 넓지 않는 거리엔 가로수들이 정연한 행렬을 하고, 곳곳의 자그마한 공원들도 기분 좋은 내음을 준다. 레스토랑에서 알려준 대로 내리막길을 따라 후딱 ..
이탈리아 5 : 폼페이에서 만난 그녀 나폴리에서 폼페이까지 가는 방법은 둘. 국철을 이용할 수도 있고 사철을 타는 방법도 있다. 우리가 고른 철도는 사철. 호텔에서 가까우니까. 아침에도 이어지던 축포와 경적을 뒤로 한 채, 지하철처럼 한번씩 역에 멈추고 냉방까지 안 되는 사철에 몸 싣기를 40분. 화산재 속에 묻혔던 신비의 도시 폼페이가 눈앞에 있다. 폼페이는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 전체가 한순간에 화산재 속으로 묻혔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상업의 중심지였고, 모습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748년부터이며 현재 도시의 3/5정도가 드러나있다고 한다.입구부터 드넓은 대지에 부서진 고대 유적들이 자리해 있다. 사라져 버렸던 도시 순례를 위해 지금부터 햇빛 제치고 전진~ 처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기원전 2세기에 지..
이탈리아 4 : 나부끼는 나폴리 아침이 늦었다. 지난 이틀은 7시에 한가로이 아침 식사를 챙겼는데, 8시 지난 오늘 조식당은 꽤 북적거린다. 그제 이미, 오늘 아침에 출발하는 나폴리행 기차표를 받아두었기에, 늦어버린 아침식사를 마치고선 서둘러야 했다. 체크아웃 후 역까지 걷는 5분 동안 벌써 땀이 흐른다. 로마보다 위도가 더 낮은 나폴리는 어떨지 명확히 짐작되는 상황. 10시 27분 출발 기차. 출발 예정 5분 전에야 열차가 플랫폼에 선다. 열차에 올라 좌석을 확인하고 앉아 출발을 기다리는데, 출발 시각 20분을 넘겨도 기차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이탈리아어로 방송이 나오긴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으니 이유를 모를 수밖에. 옆자리 젊은 이탈리아 남자들에게 영어로 물어봤지만 말이 안 통하고. 기차는 시간을 낭비하며 1시간이나 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