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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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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셈머링 비엔나로 돌아온지 며칠이나 지났건만, 신통찮은 체력으로 비실거리기만 하던 날들. 토요일 오후, 비엔나 남서쪽의 셈머링 스키장으로 답사를 간다. 잔뜩 찌푸린 하늘, 고속도로 위의 차량은 드문드문 보일 뿐. 한 시간을 달려 셈머링과 마주치자 온 세상을 무섭게 휘감는 희뿌연 안개~ 무시무시하게 쌓여있는 눈더미들에 다시 놀라고 이미 내린 눈들로는 부족한지 또 쏟아지는 눈발. 레스토랑도, 스키 대여점도 하얀 세상 속에 이마만 내민다. 스키장 입구엔 눈을 헤치고 스키장으로 향하는 스키어들이 보이고 안내판 앞 장난꾸러기는 눈뭉치에 홀려있는데~ 리프트와 곤돌라에 올라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내 눈에 슬로프는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 속 허연 불빛 아래 곡예를 하는듯 드러났다 사라지고 다시또 나..
새해살이를 시작하며 눈을 뜨니 서울이 아니라 비엔나였다. 꿈속에서 어딘지 모르는 도시를 헤맨 건 미처 새해 들일 채비가 안된 탓. 9개월 만에 만난 서울은 이상스레 낯설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도, 길고 긴 지하철 열차도, 산을 덮고 있는 고층아파트도. 정말 사람은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라더니 그새 타국의 빛깔에 익숙해졌나 보다. 20년 넘게 살던 내 동네를 들르니 그때서야 익숙함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친구들과 동료, 선배들 모두 내가 서울을 떠나오던 작년 봄처럼 즐겁게 또 볶아대며 살고 있었다. 소중한 가족들 역시 같은 모습으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서 마주할 내 나라가 있다는 건 작지 않은 축복이었다. 웃으며 떠들 친구들과 가족이 있다는 건 삶의 다사로운 원동력이다. 건조한 유럽의 겨울을 윤기 있고 매끄럽게 지..
창가에서 # 1. 빵집 아가씨 우리 집 앞 지하철 역내에 '데어만'이란 빵집이 있다. 그곳 직원들은 모두 주홍빛 옷을 차려입고 이른 새벽부터 손님을 맞는다. 출퇴근 시간이나 등교 시간이면 항상 붐비는 그곳에 유난히 눈에 띄는 직원이 있었다. 무표정한 낯빛에, 짙은 눈화장이 특이한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친절한 직원들 사이의 그녀는 늘 첫눈에 띄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녀의 왼쪽 눈동자는 심하게 일그러져 움직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 눈은 언제나 많은 가닥의 머리카락 아래에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그녀는 매일 아침 빵집을 기쁘게 연다. 그녀의 맑은 오른쪽 눈빛엔 삶의 의지가 있다. # 2. 그 아저씨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 중엔 오스트리아나 유럽으로 유학 왔다가 눌러 사..
빈의 겨울 거리 오후 5시, 겨울의 짧은 해가 자취를 지운지 이미 오래~ 빈 중심가인 링 안쪽 거리에선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장식하는 불빛들이 터져나온다. 오페라 극장에서 가장 번화가인 케른트너 거리로 가는 길~ 야외 상점들의 정수리에도, 오페라 앞 호텔에도 따스한 빛들이 공기를 적신다. 케른트너 거리의 호화로운 색채에 취해버린 사람들~ 거리마다 공휴일을 맞은 즐거운 표정들이 넘쳐난다. 케른트너 옆 그라벤 거리엔 하늘에 매달린 화려한 조명등의 행렬과 그 사이로 보이는 페스트 기념탑. 만만찮은 무게를 몇 안 되는 전선으로 어찌 견디어내는지 신비로울 정도다. 그라벤에서 왕궁으로 가는 길, 장막을 친 듯한 호화로운 불빛들의 행진~ 카페를 나서는 사람들은 향기로운 표정을 내뿜는다. 지나는 사람들을 흡인하는 공연들~ 숙련된 악사들..
겨울비 이른 아침 안개를 걷어올리고 나니, 하루종일 겨울비가 내린다. 11월 추위 덕에 미리부터 올겨울을 경외시했는데, 요즈음 며칠은 친절할 정도로 포근하다. 비바람 방향을 제대로 견적 못한 작은밥돌의 우산은 아침부터 뒤집혀버리고, 바쁜 등교길을 되돌아와 아파트 처마 아래서 우산 살을 매만지고 있으려니 적지 않은 비임에도 초연하게 온몸을 적시는 젊은 남자 하나가 지나간다. 우산을 바로하고 지하철로 향하는 도중에 만나는 많은 사람들 역시 우산없이 걷고 있다. 비를 피하려는 마음은 물론, 몸을 덜 젖게 하려 애쓰는 몸짓도 찾아보기 어렵다. 비는 내리고 있고 내리니까 맞을 뿐이다. 비켜가려 하지 않는다. 점심 시간. VIS 한국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친한 분과 함께 그 자리에 갔고,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반갑다. ..
어떤 겨울날 11월, 아무리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나라라지만, 아무리 국토 대부분이 알프스에 둘러싸인 나라라지만, 우리나라 한겨울 같은 매서운 된바람과 모진 기온과 매일 같이 조금씩 혹은 된통 쏟아지는 눈을 오랫동안 대한민국 11월에 길들여진 몸이 따라가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9월에도 바람만 불면 롱코트를 걸쳐대는 비엔나 사람들에게서 난 이미 깨달아야 했다. 그들의 겨우살이 채비는 그때 벌써 끝난 것이었음을. 그제 내린 눈은 어제의 맑은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남아있는데 오늘 아침 또, 팝콘처럼 퍼붓는 눈에 난 정말 울고 싶었다. 유난히 미끄러움에 약해 빙판길과 상극인 나. 다행히 1시간 만에 눈은 거의 그쳐주었고 그사이 재빨리 거리를 구르는 제설용+미끄럼방지용 작은돌들. 작은밥돌을 학교에 집어넣고 잠시 들른 도나우젠..
시청사광장 크리스마스마켓 정오가 지나자, 맑은 햇살이 어두운 구름에게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학교 휴교일이라 신난 작은밥돌과 단둘이 길을 나서는 건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시청 광장에 문을 연 크리스마스 선물 시장의 기분 좋은 장바람을 맞으러 간다. 1297년 '12월의 시장'에서부터 시작된 비엔나 크리스마스 선물 시장은 18세기엔 암호프 광장으로 이어졌고 1975년부터는 시청사 광장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107년 된 크리스마스 트리도 보이고 입구부터 정성껏 꾸며진 장식들이 눈에 띈다. 평일 이른 오후라 한산하다. 글뤼바인 가게 앞의 사람들. 때맞춰 잠시 뿌리던 진눈깨비처럼 글뤼바인 향은 거리에 녹아드는데~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크리스마스 초콜렛과 사탕 가게. 플라스틱통에 담긴 색색 솜사탕엔 어린 시절 추억이 흘러든다. ..
아름다운 평등 며칠 내내, 심장마저 에는 바람이 불어대더니 오늘은 바람결이 더없이 부드럽다. 오스트리아에서 맞는 네번째 계절이다. 지금은 겨울이라 덜하지만 여름엔 공감의 깊이가 10배, 20배는 더해지는 생각. 천혜의 오스트리아라고 할만한 이유를 알아본다. 오스트리아는 지리적으로 유럽 중심이다. 동쪽과 동북쪽으론 헝가리, 체코와 접해 있고 서쪽과 서남북 방향엔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의 국경이 놓여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 서쪽에 위치한 잘츠부르크는 유럽의 한가운데라고 한다. 예부터 교통의 요지임은 말할 것도 없다. 또, 탁월하고 아름다운 자연 환경. 내륙 국가라 바다가 없는 대신 바다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호수들이 많고 수확이 풍성한 옥토가 있다. 국토의 2/3가 알프스에 둘러싸여 있어 겨울이면 세계의 스키어들이 몰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