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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창가에서

 

# 1. 빵집 아가씨      

우리 집 앞 지하철 역내에 '데어만'이란 빵집이 있다.      

그곳 직원들은 모두 주홍빛 옷을 차려입고 이른 새벽부터 손님을 맞는다.      

출퇴근 시간이나 등교 시간이면 항상 붐비는 그곳에 유난히 눈에 띄는 직원이 있었다.      

무표정한 낯빛에, 짙은 눈화장이 특이한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친절한 직원들 사이의 그녀는 늘 첫눈에 띄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녀의 왼쪽 눈동자는 심하게 일그러져 움직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 눈은 언제나 많은 가닥의 머리카락 아래에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그녀는 매일 아침 빵집을 기쁘게 연다.      

그녀의 맑은 오른쪽 눈빛엔 삶의 의지가 있다.

 

# 2. 그 아저씨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 중엔 오스트리아나 유럽으로 유학 왔다가 눌러 사는 경우가 있다.

20년도 더 전에, 유럽으로 유학을 와서 오스트리아에 사는 어느 아저씨.     

자주 마주치는 사이가 아니라서 그의 가족사나 배경은 잘 모른다.      

학위를 어디까지 취득했는지, 몇 개 국어를 할 줄 아는지도 잘 모른다.      

지금도 굉장한 기억력을 발휘하는 걸 보면 괜찮은 두뇌인데, 성실성과 사회성이 기막히게 부족하다.      

말을 듣기보다 하기만을 좋아하고 말만 앞서갈 뿐 성과나 결과물은 전혀 없다.      

우리나라 경제와 복지에 대해 늘 불평을 하고 수치심만을 언급한다.

그에게 대한민국은 부끄러운 조국일 뿐이다. 

 

# 3. 하늘에 있는 그녀      

몇 년 전, 지인 아들의 결혼식에 그녀와 함께 참석한 그녀의 남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1주일이 흐르고 한 달이 지나도 남편에게서는 연락이 없고 행방도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한 느낌에 출입국을 확인하니 남편은 사라진 바로 그날 출국했던 것이다. 다른 여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남은 건 치떨리는 배신감과 남편의 빚 그리고 그녀의 병마였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하늘로 떠나갔고 귀국해서 다른 곳에 사는 남편은 끝내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50대, 엇나간 사랑이 그렇게 절실했을까. 평생 일구어놓은 가족, 일, 친구를 다 두고갈만큼.

 

 

흐린 오후,

성실, 신뢰, 이해, 배려,

가장 흔한 단어들을 떠올려 펴놓으며.

 

12월, 쉔브룬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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