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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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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향하여 오스트리아에 머물렀던 3년 10개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적응하기 힘들었던 첫 해, 어디에도 마음 붙이기 힘겨웠고 특히 4시면 찾아오는 겨울 어둠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세상의 즐거움을 깨닫기까진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를 쏘다니고 옆 나라들을 뛰어다니며 새로운 세상을 맞잡기 시작했습니다. 가끔은 이 나라 사람들의 텃새를 겪기도 했고 또 이곳 한국인들의 이중성과 오만함에 답답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럽이라는 세상과 오스트리아라는 나라가 준 크나큰 선물은 이 모두를 덮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날의 푸르른 하늘, 쉔브룬 글로리에테에서 마신 아인슈페너, 필름페스티벌에서 지은 친구와의 추억, 볼프강 호수를 바라보던 눈부신 표정들. 수많은 기억들과 추..
프라터와 콘서트 비와 햇살이 번갈아 드나들던 5월 마지막 일요일. 2년 만의 프라터 공원 나들이. 큰밥돌은 절대 놀이기구를 타지 않겠다는 나를 잡고, 기어코 '크레이지마우스'인가 뭔가에 몸을 실었다. 저 아찔한 기구에 앉아있던 3분, 앞에 탄 두밥돌보다 뒷자리의 내 목소리가 더 컸음은 물론이다. 신록은 푸르게 익어가고 봄 하늘도 푸르게 영글어간다. . 공원을 거니는 꼬마 기차도, 영화 속 장면 같은 야외 카페도, 모두 투명한 푸르름을 머금은 날. 작은밥돌 학교에서 열린, 종업을 코 앞에 둔 시점의 6월 첫째 화요일의 여름 콘서트. 특히 6학년 아이들 전체는 3개월 동안 음악시간에 갈고 닦은 솜씨를 선보인단다. 6학년 합창단의 자유로운(?) 합창과 9, 10학년 여러 연주팀의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연주에도 객석의 학부모들은..
선글라스 별곡 큰밥돌의 선글라스가 사라진 지 두 달이 지났다. 3월 초에 스키장 다녀온 후 행방을 감춘 큰밥돌의 10년된 선글라스. 스키장 갔던 날을 또렷이 기억하는데다가 평소에 뭘 흘리거나 잃어버리는 큰밥돌 성격이 아니었기에 분명 집구석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거라 확신하고 선글라스 수색에 들어가기를 며칠. 그러나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선글라스는 집구석 어디서도 출현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우리나라보다 햇살이 강하기 때문에 선글라스 없이 운전하거나 걸어다니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애용하는 진짜 이유는 선글라스 없이는 배겨낼 수 없는 강하디강한 햇살 때문인 것이다. 이미 햇살 뜨거운 5월, 행방불명된 선글라스를 이젠 정말 더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토요일, 집에서 가까운 쇼핑몰의 안경점으로 가서 동양인의..
봄 맞이 그제부터 서머타임이 시작됐고, 장장 열흘동안 닫혀있던 작은밥돌 학교 교문이 월요일인 어제부터 드디어 열렸다. 게다가 오늘은 그 발음만으로도 상쾌한 4월, 제대로 된 봄이 시작되었다. 날씨도 정말 맑디맑다! 예년보다 빠른 부활절 3일 연휴엔 꿈속에서마저 별렀던 독일 자동차 여행을 떠났었는데, 유럽 전역의 이상 기후 덕에 눈이 펑펑 내리는 등 한겨울 날씨가 완벽히 부활하고 말았다. 물론 그런 것쯤 아랑곳하지 않았고 여행은 즐거웠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후 남겨진 과제는 며칠 안 남은 작은밥돌의 방학동안 유지되어야 할 '모자 간의 평화'였다. 쌀쌀한 바깥 바람에도 함께 거리를 쏘다니고, 가끔 당근도 던져주는 피눈물 노력으로 평화는 무사히 지속되었다. 이렇게 오래도록 조용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헨젤과 그레텔 '헨젤과 그랬대' 인터넷으로 우리나라 인기 프로그램을 보던 중, 시청자가 보낸 재미난 별명 중 탁월한 단어들의 조합이 흘러나왔다. 헨젤과? 뭘 그랬대? 누가? '헨젤과 그레텔'의 기막힌 변형이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가 Staatoper 아닌 Volksoper에서 상연된다고 한다. 연말엔 일도 없이 꼼지락대느라 예약 시기를 제대로 잡지 못했고, 그래서 새해 첫날부터 폭스오퍼 홈페이지를 찾았으나, 국립 오페라극장과는 달리 독일어로만 된 예약 과정을 세세히 알기엔 우리의 독일어가 너무나 가련하고 단출했다. 겨우 예약을 마친 공연의 좌석은 구석탱이, 그것마저도 몇 자리 남아있지 않았다. 1월 6일, 이르지 않은 오후. 늘 승용차를 세우던 왕궁 주차장에 역시나 차를 재워두고, 트램을..
새해에는 다시 못 올 마지막 밤부터 새해 늦새벽까지 하늘의 끝없는 불꽃 행렬들은 새 희망과 새 설렘을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낯익은 우리가 앉은 탁자 위에도 사랑과 환희가 출렁였지요. 맑고 고운 잔에 새 꿈을 부으며 모두의 건강과 안녕을 빌었습니다. 지금 마음에서 너울거리는 이 자그마한 소망이 또 한 해를 보낼 즈음엔 빛나는 현실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아름다운 새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거리에서 '그 도시요, 볼 거 하나도 없어요.', '거긴 유럽이 아니예요. 위험하니 가지 마세요.' 유럽여행 카페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초보 회원이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도시에 대한 정보가 적거나 여행 루트에 고민이 생겼을때 어렵게 꺼낸 질문에, 여행 경험자인 다른 회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볼 것 없어요'라고. 다른 대륙에 비해 유럽은 나라별로, 도시별로 또 시대별로 문화와 예술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로마에서는 고대를 느끼고, 파리에선 박물관과 미술관에 취하고 런던에선 역사와 뮤지컬에 빠질 수 있다. 문제는 누구나 손꼽는 아주 유명한 여행지가 아닌 곳을 들를 때의 마음가짐이다. 그곳이 가진 특색과 문화, 삶을 살피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 곳인가를 따진다. 사진으로 잘..
비자와 경찰 벨기에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 늘상 1년마다 연장하는 비자 때문에 가족 셋이 모두 아침 일찍 관청으로 향했다. 일찍부터 움직인 덕에 다행히 비자 담당경찰관의 근무실엔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터였다. 똑똑. 큰밥돌이 밖에서 노크를 하니 인상 더티한 경찰이 나와서는, 복도에서 5분 기다리란다. 흠, 저 얼굴은 재작년이나 작년이나 또 지금이나 변함없이 찌그러져있군. 그런데, 기다리라던 5분이 지났음은 물론 10분,15분이 흘러도 더티한 얼굴은 복도로 나올 줄 모른다. 뭐냐고, 제 시간은 금이고 우리 시간은 개떡이냐고. 다시 노크를 하니 자기가 들어오랄 때 들어오란다. 그로부터 10분, 씰룩거리는 표정으로 담당경찰이 우릴 부른다. 준비해 간 여러 서류를 뚫어져라 살펴 훑어보고 다른 곳에 전화해서 확인도 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