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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삶과 사랑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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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3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 산 너머 산. 삶의 계절마다 거대한 산이 버티었다. 늪 속을 걸어야만 했던 날들. 위안은 스스로만 줄 수 있었다. 그 후 찾아온 깊디깊은 골짜기. 사면이 산이었다, 오래도록. 모르는 게 약이듯 시간이 약이다. 그렇게 산은 들이 된 듯했다. 그리고 지금. 그저 緣이고 命이라 측은지심으로 欲을 지우면 될 터인데. 생의 늦가을, 어느 것도 물리지 못하는 이 심사. 다시는 묻지 말자. 사라지지 않고 문득 붙들리는 그순간, 상처만 있을 뿐 답안은 없으니.
돌이키다 그리운 시간들은 돌이킬 수 없어서 아프고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시간들은 잊혀지지가 않아서 아프다. -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중 - 드라마를 보다가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단번에 알아버렸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이렇듯 삶이 아픈 거였구나. 돌아갈 수 없어서 잊을 수 없어서 사람들은 늘 가슴 밑바닥을 긁으며 과거를 한탄하고 현재를 아파한다. 해답 어려운 시공 속에서 우리가 애타게 잡고 싶은 건 과연 무얼까. 그리움일까, 망각일까.
오늘과 내일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미국 어느 대학 도서관에 있는 글귀라 한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는데, 오늘 걷지 않음은 물론 내일이 되어도 뛰기는커녕 걷기조차 거부한다면 어찌되는지. 걸을 수조차 없고 걷기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잠시동안의 생각. 어찌됐든 삶은 이어질 것이다. 방식과 수준 그리고 사고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겠지. 봄이 올 듯 올 듯하다. 기다려지지도, 애착스럽지도 않은 봄이란 것이 가끔, 아주 가끔 간절할 때가 있다.
파리에서 온 편지 2005년 3월부터 오스트리아에 살기 시작한 이후, 처음 떠난 긴 여행지가 파리였다. 사실은 미리 예정한 여행이 아닌, 곧이어 반드시 일어날 '어떤 무지몽매한 사건'의 공모자가 절대 되지 않기 위해 급히 파리로 도피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이후의 다른 여행과는 달리 준비가 매우 부족했고, 6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파리에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은 가장 떨어지는 여행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효율적인 여행이란 내가 원하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파리 여행은 무엇을 보고 어디를 걷고 무엇을 느껴야 할지 사전 사고가 거의 돼있지 않았었다. 그러다보니 남들 가는 유명관광지만 따라다녔고 파리의 지저분함에 실망하기 바빴다. 그래서 파리는 지금까지도 가장, 늘 아쉽다. 어느 날, 인터넷 서점에서..
향수 세상 모든 사물에는 향기가 있고, 그 향기를 가두는 방법에 빠졌던 한 남자가 있다. 천재적인 후각을 지닌 장 밥티스트 그르누이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맡겨지고 13살부터는 가죽 제작상인에게 팔려가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다. 청년이 된 그는 어느 날, 심부름 가게 된 시내 중심가에서 갖가지 냄새에 빠지고, 우연히 만난 한 여인의 향기를 따라 그녀를 쫓다가 뜻하지 않게 그녀를 죽이게 된다. 센 강 다리 위엔 한때는 잘 나갔던 30년 경력의 향수 제조상인 주세페 발디니의 향수 가게가 있다. 염소 가죽 배달을 하러 발디니의 가게에 들른 그르누이는 발디니 경쟁자의 새로운 향수의 배합을 완벽하게 알아맞히고 지금껏 없었던 또다른 향수까지 만들어내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그르누이를 고용한 후 발디니의 향수 가게는 날로 번..
먼 그대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이별의 뒤안길에서 촉촉히 옷섶을 적시는 이슬, 강물은 흰 구름을 우러르며 산다. 만날 수 없는 갈림길에서 온몸으로 우는 울음. 바다는 하늘을 우러르며 산다. 솟구치는 목숨을 끌어 안고 밤새 뒹구는 육신,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움에 산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별 하나 두고, 이룰 수 없는 거리에 흰 구름 하나 두고. - 오세영, 먼 그대 - 아핫, 3월 말이 어찌 2월보다 더 춥다. 3월 하루, 어느 집 정원에 가득 핀 개나리를 보곤 나는 이미 겨울에게 등판을 보여줬었다. 그런데, 요상하고 괴이한 이 기후는 겨울과 봄의 경계를 알뜰히도 혼합시켜버렸다. 사흘 연이어 몰아치는 한동안의 눈발,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한데, 봄은 그리움보다 더 멀기만 하다.
가을 햇볕 가을 햇볕 안도현 가을 햇볕 한마당 고추 말리는 마을 지나가면 가슴이 뛴다. 아가야 저렇듯 맵게 살아야 한다. 호호 눈물 빠지며 밥 비벼먹는 고추장도 되고 그럴 때 속을 달래는 찬물의 빛나는 사랑도 되고. 9월 중순이 지나면서 해가 말도 못하게 짧아져버렸다. 아직은 일광절약시간제가 실시되고 있는데도, 저녁 7시면 어둠이 내려버린다. 서머타임이 끝나는 10월말엔 깜깜한 오후 5시를 만날 것이고 12월과 1월엔 컴컴한 오후 4시를 맞아야 한다. 짧은 가을과 긴 겨울을 날 마음가짐이 재작년보다는 작년이, 작년보다는 올해가 조금씩이나마 느긋해지는 걸 보면, 아니 각오의 칼날이 무디어지는 걸 보면, 이곳의 비수기와도 꽤나 친근해진 건 사실이다. 이제 막 시작된 낙엽의 향연도 두럽지 않고 예측 불허의 비바람도 초연..
라디오 스타 보는 내내 웃음을 끊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 한편으론 재미나고 또 한편으론 황당해서. 그리고 러닝타임이 계속될수록 혈관 속으로 퍼지는 감동 때문에... 1988년 가수왕 '최곤'. 그러나 지금은 강변 카페촌에서 그의 전무후무한 히트곡 '비와 당신'을 별 열정도 없이 부르며 사는 한물 간 가수다. 그의 20년지기 매니저 박민수는 늘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는 최곤의 뒤치다꺼리를 기꺼이 감내하면서. 항상 최곤을 최고 스타로 대접하며 아니 받들며 그의 재기를 엿본다. 그러던 중,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통폐합을 3개월 앞둔 영월방송국의 라디오 DJ 자리에 앉게 된 최곤. 어차피 의지없이 밀려밀려 맡게 된 일이라 그에게 열의를 기대하는 건 무리. 그러다보니, 방송 사고는 기본이고, 대본 무시에, 제멋대로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