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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숨은 그림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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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벽이 사라졌다 어제까지 나를 둘러싼 벽 바스라질 듯 녹슨 지붕만 부러질 듯 휘청이는 기둥만 남아 그러나 처음부터 없던 벽 내 눈만 본 환시의 벽 벽은 가는 모래알이 되어 가늘게 부는 바람에 묻어 나를 덮고 있다
잊었더라 잊었더라 전화 벨이 울린다. 아득한 겨울 그림자 너머 더 아득한 당신의 목소리. 언제였던가. 당신이 준 명도 없는 거리, 내게 남은 채도 없는 흉터. 아직도 겨울인 그 거리엔 명도 없는 시간이 여전히 흔들리는데, 당신은 다 잊었더라. 이젠 굽이굽이 잊었더라. 2007. 12.
공사 중 공사 중 작년 이맘 때도 뜯어고치더니, 저 도로에 문제가 또 생겼나보다. 그때와 같은 이유로 또 공사 중. 한 번 열어 엎었던 길을 다시 열어젖히는 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내 마음도 또 열리어 엎어지려 한다. 이건 분명 봄 하늘 탓이다. 네 탓은 정말 아닌 게다. 결단코.
자취 자취 머리카락을 잘랐다. 바래고 갈라져, 타다만 재 같던 그 끝이 뿌리에 몰래 심어둔 물기를 바싹 삼켜버릴까봐. 내가 자른 것은 오래된 야음(夜陰)의 자취였다.
흔적 흔적 높다란 돌성엔 설화 속 공주가 없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낡은 탄식은 그러기에, 가둬졌던 그녀가 두고간 해진 모자와 구겨진 신발과 휘어진 날개가 내는 소리 미처 가져가지 못한, 부석거리는 그녀 심장이 내는 소리
상심 처음엔 신발에만 물이 고인 줄 알았습니다. 물을 따라 버리고 신발을 말리면 될 줄 알았습니다. 키는 깊이를 모른 채 낮아져만 갔고 가슴은 오그라져 조여들기만 했습니다. 꿈인가 했지요. 자리를 털면 사라질 꿈이려니 했습니다. 늪이더군요. 누구도 날 건지러 오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려면 재단할 수 없는 늪의 수심을 스스로 밟고 또 밟아 가장자리의 풀 포기라도 잡아야 했습니다. 미궁이더군요.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실타래를 쥐어주는 그녀조차 없었습니다. 촘촘하게 짜여져 바늘 끝조차 들어가지 않는 옷감처럼 마음엔 실 한 가닥 들어올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셈할 수 없는 날들 동안 매일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구름은 늘 비를 머금은 먹장구름이었고 바다에선 해일이 일었습니다. 하루, 또 하루 그리고 더 하루. ..
빗속에서 빗속에서 해 떨어지니 빗방울 듣는다. 햇빛 살라먹은 자리에 늦가을 풀잎처럼 누워버리는 고운 물기 비안개 속 누가 손을 건네고 그 손가락 한 마디 겨우 쥔 채 잃었던 시간을 더듬는다. 꽃이 오고 강이 오고 온 바다가 달려든다. 사랑임을, 애타게 노저어 지금도 항해하는 사랑임을, 이제야 알아채는 연연한 이 어리석음. 어느 새 비가 긋는다.
어느 하루 어느 하루 내 청보라빛 심장에서 당신을 꺼내었다. 나의 가늘한 뼈마디를 잘라 당신의 우둔한 손끝을 이어준다. 이젠 어느 것도 남지 않아 애끓는 소리만 낼 뿐인 바다 모래 같은 나의 뼛조각들. 그것들이 연명할 날이 길지 않다는 것을 당신도, 나도 알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은 향연에 잠기고 나는 내가 지은 고독에 잠길 뿐. 세상은 이리도 애처롭게 눈부신데 당신의 가슴은 어디론가 치닫고 난 밤새 영혼의 바퀴를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