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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동유럽 이야기

헝가리 : 부다페스트와 함께한 토요일

바치 거리의 헤르메스 동상

올 3월엔 꼭 부다페스트에 가려 했었다. 

몇 해 전 겨울, 잠시 들렀던 부다페스트는 시리도록 추웠던 기억밖에 없어, 내겐 늘 춥고 고단한 도시였다. 

지리적으론 비엔나와 가까웠지만 그 고단한 기억 때문에 부다페스트는 여행 순위에서 항상 뒤로 밀리곤 했다.  

그랬던 부다페스트를 드디어 새봄맞이 첫 여행지로 정했는데, 3월 주말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래서 내린 결론. 3월엔 신들도 우리가 부다페스트 가는 것을 막는구나.

 

두나강(도나우강)

이런 곡절 끝에 예정했던 이틀 대신 당일치기로 부다페스트를 훑기로 했다.

4월, 그리고 토요일. 빈에서 부다페스트까지는 240km 거리.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헝가리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30분 이상을 허비하고 나니 기운이 빠졌다.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이나 이탈리아 쪽으론 국경 통과시 검사가 거의 없는데 비해, 아니 국경이라 할만한 것이 없는데

비해 -국가명이 적힌 이정표와 초소가 전부-헝가리나 체코,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와는 그 경계를 철저히 한다.  

 

승용차가 움직인 시간만으로 본다면 2시간반 만에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차량 안전을 위해 특급호텔 지하의 유료 주차장에 차를 넣어두고 식당과 상점이 몰려있는 바치 거리 향했다.

물론 점심 요기를 위해서다. 우리 중엔 주린 채로는 절대 여행을 안 하는 녀석이 있다. 그녀석은 부다페스트에 처음이다.

하루만에 볼 수 없는 여행지에서의 시간이 딱 하루만 주어졌을 때, 이곳저곳 다 눈도장만 꾹꾹 찍고 다닐 수도 있지만,

우리가 즐겨쓰는 방법은 욕심내지 않고 일부만 천천히 보는 방법이다. 그것도 걸어다니면서.

 

왕궁

부다페스트는 구시가인 부다 지구와 신시가 페스트 지구로 나뉘는데, 오늘의 초점은 부다 지구 왕궁 주변이다.

바치 거리를 나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엘리자베트 황후 이름을 딴 에르제베트 다리를 건너니 도나우강 조망이

뛰어나다는 겔레르트 언덕이 보인다. 왕궁을 향하는 발걸음이 바빴기에, 아쉽지만 겔레르트는 그냥 통과.

10분쯤 걸었을까. 반갑게도, 또 기특하게도 오래된 옛 성의 느낌을 주는 왕궁이 또 다른 언덕 위에 가만 나타나준다.

 

왕궁
헝가리의 시조인 아르파드를 낳았다는 새 '툴루'

굉장한 규모의 이 왕궁최초로 건축된 것은 13세기.

그후 15세기에 일부가 재건축되었지만 16세기엔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고, 17세기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하에 재건되었다가 다시 화재, 전쟁 등으로 파괴되었다. 헝가리의 역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왕궁이 현재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지금은 역사 박물관, 국립 미술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북쪽 끝 철책 위엔 헝가리 건국의 아버지인 아르파드를 낳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새 '툴루'가 두나강을 바라보고 있다.

맑은 날씨, 맑은 바람, 여행하기에 정말 쾌적한 날이다. 여기저기 무리지어있는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보인다. 

 

부다페스트 첫 방문 때 기억나는 두세 가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어부의 요새 간다.

몹시 세찬 바람이 불던 그 겨울, 어부의 요새에 올랐을 때, 혼자 배낭여행을 하는 한국 여인이 애타는 얼굴로 우리를 보며

비엔나로 가는 방법을 물었다. 오스트리아에서 한달반 머물 때였는데 승용차에 자리만 있었으면 정말로 태워주고 싶었다.

 

어부의 요새
두나강
마차시 성당

어부의 요새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되어 1902년에 완공된 건축물로, 헝가리풍 뾰족지붕에

얹힌 7개의 탑과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요새 앞 광장의 기마상은 헝가리 최초의 국왕인 성 이슈트반이다.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은 어부들이 이곳에서 적을 막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도 하고 이곳에 어부의 조합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지어졌다고도 한다.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보는 도나우강이 참 아름답다. 멀리 국회의사당도 보인다. 

어부의 요새 곁엔 13세기에 지어져 한때 이슬람사원으로 쓰이기도 했던 마차시 성당 있는데, 외관이 비엔나의

슈테판 성당과 상당히 흡사하다. 마차시 성당은 공사 중이고 성당 앞 광장에 있던 삼위일체탑은 왠일인지 행방불명.  

어부의 요새 긴 회랑 중앙의 카페에서는 은은한 바이올린 연주가 들려오고, 회랑의 한 구석에선 야바위꾼이 오가는

여행객을 유혹하고 있다. 자수 제품을 들고 핸드메이드를 외치는 여인들은 어부의 요새 안팎을 서성이고 있다. 

 

어부의 요새

어부의 요새를 나와 거리를 걷다 금세 만난 세체니 다리.

19세기에 만든 이 다리는 헝가리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세체니 백작의 이름을 따서 다리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다리 야경이 구슬(세체니)이 이어진 모습 같아 세체니라 부른다고도 한다.

다리 양편으로 세워진 네 마리의 사자상엔 혀가 없다. 언뜻 보면 혀 뿐만 아니라 이빨도 없어보인다.

혀 없는 사자는 과거 합스부르크의 위세에 눌렸던 헝가리 국민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지.

그런데, 저기 저기 가는 초록 뒤통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군요~

 

세체니 다리
국회의사당
민속박물관

부다페스트의 상징 국회의사당.

1904년에 지어진 국회의사당의 위용을 도나우강 쪽에서 느끼고 싶었지만, 강 맞은편에서도, 강 옆에서도 국회의사당

바라보기가 여의치 않았다. 철책으로 둘러싸인 국회의사당 주변엔 딱딱하다 못해 음침한 얼굴의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고, 관광버스와 여행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앞을 오간다. 

우리도 국회의사당 앞 공원 벤치에 셋이 나란히 앉아 놀다가 졸다가...

그러다보니 국회의사당 바로 앞에, 외부 조각상이 돋보이는 민속박물관이 덤처럼 서 있다.   

 

푸른 하늘, 뿌연 강물. 다시 도나우강을 건넌다. 오늘 강 참 여러 번 건너네~ 

다리는 아프고 저녁 먹긴 이르다. 이럴 땐 커피 한 잔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것도 좋다.

 

저녁 으스름이 다가오기 전의 부다페스트 거리에 활기가 퍼진다.

유람선을 개조한 식당에서 바라본 도나우강은 잔잔히 흘러가고, 트램 선로에 기대어 본 세체니 다리는 보석처럼 빛을 낸다. 

차창 유리 밖엔 부다페스트 야경이 축제일처럼 손을 흔들고 있다.

 

 

< 2007. 4. 21. 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