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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비자와 경찰

벨기에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

늘상 1년마다 연장하는 비자 때문에 가족 셋이 모두 아침 일찍 관청으로 향했다.

일찍부터 움직인 덕에 다행히 비자 담당경찰관의 근무실엔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터였다.

 

똑똑. 큰밥돌이 밖에서 노크를 하니 인상 더티한 경찰이 나와서는, 복도에서 5분 기다리란다.

흠, 저 얼굴은 재작년이나 작년이나 또 지금이나 변함없이 찌그러져있군.

그런데, 기다리라던 5분이 지났음은 물론 10분,15분이 흘러도 더티한 얼굴은 복도로 나올 줄 모른다.

뭐냐고, 제 시간은 금이고 우리 시간은 개떡이냐고. 다시 노크를 하니 자기가 들어오랄 때 들어오란다.

 

그로부터 10분, 씰룩거리는 표정으로 담당경찰이 우릴 부른다.

준비해 간 여러 서류를 뚫어져라 살펴 훑어보고 다른 곳에 전화해서 확인도 하더니, 다음 주까지 큰밥돌에게 서류 하나를

가져오라 한다.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이제껏 한번도 요구하지 않던 것을 말이다.

 

작년엔 내게 취업비자 연장에 필요한 독일어학원 수강 확인증-이게 아니라도 열공-이 있느냐고 쓸데없이 속을 헤쳐놓더만.

사업비자-이 나라 국민의 일자리를 외국인에게 나눠주는 것이 취업비자라면, 사업비자는 자기나라 국민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비자라 동거가족에 대한 비자 발급조건이 전혀 없음. 2007년 10월 기준- 소지자인 큰밥돌에게 곁다리로 들러

붙어있는 가족일 뿐 너희 나라에 일하러 온 게 아니거든.

 

얼굴 노란 동양인에게, 그것도 잘 사는 나라가 아닌 힘없이 두 동강 나있는 약소국 국민에게 순순히 아무 태클 걸지 않고

비자를 내주는 건 선진국 공무원으로서 자만심 상한 노릇이었나보다. 번번히 명분도 없는 시비를 걸고서야 비자를 준다.

 

한번씩 이런 일을 겪으면서 깨닫는 건, 이렇듯 힘 없는 조국에 대한 속상함과 원망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약한 조국을 가진

사람들을, 나 역시 저넘의 경찰관처럼 넘겨짚어 무시한 적이 없었나 하는 점이다. 동남아시아나 서남아시아, 남미 등에서

얼굴들을 보며 나 또한 남의 나라에 사는 같은 처지이면서도 마음으로 혀를 찬 적이 없었나 하는 자성을 해본다.

 

그나저나 이 나라 경찰은 근무부서 로테이션이란 걸 안 하나.

더티 경찰 근무실의 옆 경찰은 배우 같이 훤하게 잘 생겼더만. 내년엔 저 경찰과 제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제 오전, 흐린 하늘 사이사이로 비엔나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진눈깨비로 시작된 눈은 소복히 쌓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펑펑 쉴새없이 쏟았습니다.

눈과 씨름하느라 겉옷을 흠뻑 적신 작은밥돌.  

오늘 아침엔 어제의 눈은 완벽히 사라지고 햇살이 환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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