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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스페인 8 : 피카소와 알카사바

새벽 4시, 1층 bar에서 들리는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리듬 소리에 잠이 깼다.

오토바이 경적과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의 고함소리까지 온갖 소음들로 다채롭기 그지없는 새벽이다.

어제처럼 음악 소리는 6시가 돼서야 드디어 그쳤다.

6시면 다들 기상하기 시작할 시각인데, 웬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밤새워 음주가무에 힘쓰는지 알 수가 없다. 

 

그라나다 버스터미널

8시반, 숙소를 나와 우린 그라나다 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9시반에 출발한 한적한 버스는 11시 20분, 우릴 말라가에 내려놓았다.

코스타 델 솔 지역의 중심지인 말라가인구 50만명의 대도시로, 1년 내내 따뜻한 태양이 내리쬐는 휴양지이다.

버스 터미널에서 구시가로 가는 동안 수없이 펼쳐진 야자나무의 숲이여.

 

마리나 광장

한참을 걸어 구시가의 중심 마리나 광장에 이르렀다.

뜨거운 볕과 빛이 내리붓는 광장 주변 이곳저곳 길목마다 온통 공사 중이다.

마리나 광장에서 몇 발자국 옮기면 16-18세기 이슬람사원 자리에 건립된 말라가 대성당 보이는데, 성당 오른쪽 탑이 미완성 상태라

'라 만키타', 즉 외팔이라 불린다고 한다.

 

말라가 대성당

화가 피카소의 부모님이 결혼식을 올렸고 또 피카소도 세례를 받은 산티아고 성당 눈에 띈다.

성당 입구에 그다지 남루해 보이지는 않는 아낙이 의자에 앉아 손바닥을 보인다.

순간 입장료를 받는 사람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태연한 자세로 구걸 중인 아낙이었다.

 

피카소가 세례받은 산티아고 성당

피카소 생가 있는 메르세드 광장까진 구시가 중심에서 조금 더 걸어야 했다.

생가 주변엔 피카소 탄생 125주년을 축하하는 대형 기념물이 건물 벽에 걸려있다.

생가 1, 2층엔 피카소의 습작을 비롯해서 삽화와 회화, 또 그가 사용했던 크고 작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피카소의 첫번째 아내가 결혼식 때 입었던 옷과 면사포였다.

가장 아름다운 날을 장식했던, 이제는 빛바랜.

생가를 나서는 아쉬움을, 1층 기념품 코너에서 '게르니카' 엽서를 구입하는 것으로 달래본다.

 

피카소 생가

다시 돌아온 말라가 구시가.

꽤 오래된 듯한 식당에 들어 '메뉴델디아(오늘의 메뉴)'를 주문했다.

샐러드부터 차례로 음식이 나오는 사이, 다른 테이블을 흘깃 보니 다들 붉은 와인이 올려져 있다.

스페인이 프랑스나 이탈리아 못지 않은 와인 생산국이라더니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듯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말라가에 온 가장 중요한 이유이자 목적지인 알카사바로 향한다.

뙤약볕은 여전히 그 기세를 늦출 마음이 없는 듯했다.

알카사바 입구에선 알카사바와 히브랄파로 성을 둘 다 올라갈 수 있는 콤비티켓도 판매하고 있었지만, 히브랄파로까진

체력에 무리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알카사바에만 들어가기로 했다.

 

말라가 알카사바

11세기에 지어진 성채인 알카사바.

조금은 알함브라 궁전을 연상시키는 붉은 석벽을 따라 경사진 길을 오르다보면 말라가의 정경이 보인다.

멀리 고층아파트가 있고 투우장이 있고 또 항구도 자리해 있다.

작은밥돌은 알카사바 안내서에 쓰인 문구를, 오늘따라 글자 보기 싫어하는 두 어른에게 번역서비스를 제공해준다.

 

경사진 터에 성채만 있으리란 짐작과는 달리 알카사바 안에도 건물이 남아있었다.

다분히 아라비아식인 아담한 건물과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나무와 꽃, 분수에 둘러싸여 그 멋을 드러내고 있다.

 

알카사바

아치형 문과 기둥, 낡고 마모된 아라베스크 문양의 흔적을 가슴에 담아본다.

알함브라처럼 크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시간과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알카사바에서 또다른 감동을 느낀다.

 

알카사바

알카사바를 나오면 알카사바 입구 쪽에 로마시대의 유적 하나가 우릴 맞는다.

이름하여 로마 극장. 공사 중이라 어수선한 계단 주변을 몇몇 사람만이 서성이고 있다.

 

로마 극장

벌써 4시반이 넘어있다.

그라나다로 돌아갈 버스 출발시간을 꼽아보니 예정했던 시각을 넘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바다를 낀 휴양지인 말라가까지 와서 바다를 외면하고 갈 순 없으니 말이다.

해변으로 걸어가는 거리에도, 말라가 대학 앞에도 남국의 야자수가 만발하다.

 

말라가 대학

저게 뭐지, 말라가의 해변 이름인 '말라구에타'를 모래로 만들어놓은 것인가.

가까이 가서 보니 모래는 아닌 좀더 단단한 재질로 형성해 놓은 조형물이었다.

아무렴 어때, 바다도 좋고 분위기도 좋으니 바다에 발이라도 담가봐야지.

 

말라가 해변

해변에서 말라가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해변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 타기도 힘들더니 터미널인 줄 알고 내린 곳은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냐고. 세 번이나 길을 물어 겨우 찾은 터미널.

터미널 바로 옆의 기차역 쇼핑몰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말라가 행 버스에 올랐다.

 

말라가가 출발지 아닌 경유지였기에 버스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때와는 달리 티켓엔 좌석번호도 없어서 뒤쪽의 비어있는 좌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앉자마자 고단함이 몰리며 비몽사몽인데, 통로 건너편의 젊은 여인네가 작은밥돌 얼굴을 스케치하고 있다.

슬쩍슬쩍 언뜻 본 그림이 퍽이나 작은밥돌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다시 돌아온 그라나다.

오늘도 여름 밤 거리는 활기차고 경쾌한 공기로 가득하다.  

 

 

< 2008. 6. 25.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