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스페인 9 : 세비야와 춤을

그라나다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맑고 푸른 아침, 텔레비전 뉴스에선 밤 사이 들어온 사건 사고를 전하고 있는데, 한 나이트 클럽의 천장이 무너졌다는

어이없는 소식이 보도된다. 인구가 많고 밤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보니 터지고 벌어지는 일이 많긴 하다.

 

짐을 꾸려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고, 10시가 되자 세비야 행 버스가 출발한다.

인터넷으로 버스 좌석을 예약할 때 맨 앞자리를 골랐는데, 버스 기사가 틀어놓은 아라비아풍 라디오 음악을 듣는 즐거움도,

탁 트인 시야도 모두 다 썩 괜찮다.

옆 자리의 젊은 스페인 여인은 에어컨 때문에 춥다는 내 말에, 내 자리 에어컨까지 자신 쪽으로 돌리더니 연신 재채기를 한다.

에고, 그렇게 친절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리고 에어컨은 끄면 될 것을 왜 자기 자리 쪽으로 돌려놓고 그 고생을 했을까.

 

그라나다에서 세비야 가는 도로

12시, 쭉쭉 뻗어달리던 버스가 어느 지점부터 속도를 전혀 못 내고 있다.

사고가 났나 했더니 차선을 몽땅 막아놓고는 모든 차량을 검문하는 중이었다.

정차한 버스 안으로 1980년대 한국군인차림의 경관이 들어오더니 큰밥돌에게 여권을 보여달라고는 여행 중이냐고 묻는다.

경관은 승객 중 외국인인 듯한 사람만 골라 확인하고 이내 버스 밖으로 빠져나간다. 

 

세비야 호텔

1시, 예정보다 조금 늦게 안달루시아의 최대 도시인 세비야에 도착한 우리는 미로 같은 길을 전혀 헤매거나 헷갈리지 않고

기특하게도 도보 10분도 안 돼 예약한 호텔에 이르렀다. 파티오가 있는 이 호텔, 정말 너무 예쁘다.

여행 다니며 머문 호텔 중에 외관이나 내부, 객실이 가장 예쁘고 정성스러운 곳이었다.

리셉션 직원의 친절 또한 백만불 짜리. 지글지글 타오르는 바깥과는 달리 에어컨 켜진 객실은 천국이었다.

작은밥돌은 TV에 재빨리 눈길을 주고, 난 물을 끓여 쌀국수 위에 부었다. 크, 국물이 끝내준다.

  

'세비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돈 주앙(돈 후안)이다.

카사노바 못지 않은 바람둥이의 대명사이기도 한 그는 중세 전설 속에 등장하는 바람둥이 귀족으로, 여자를 유혹한 후 버리고 죽이는

엽색 행각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돈 주앙'이 다시 세상으로 존재를 드러낸 것은 17세기 '티르소 데몰리나'가 쓴 '세비야의 농락자와 초대 받은 석상'이란 작품에서인데,

본명이 가브리엘 사제인 작가는 세비야를 배경으로 돈 주앙의 악행을 통해 부패하고 타락하고 질서가 무너진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세비야 대성당

3시, 안달루시아의 태양은 말도 못하게 지글거리고 있다.

그러나 마드리드 가는 스페인 고속철도 AVE 예약에 실패한 이유 -스페인 철도청의 징글징글한 백만번의 예약 오류-로

세비야 일정이 줄어들어 시간이 없기 때문에 태양을 탓하며 호텔 객실에 가만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세비야대성당 입구의 청동 여신상

구시가의 중심, 세비야 대성당으로 향한다.

햇볕 내리쬐는 팔다리가 여기저기 따끔거린다. 현재 기온 39도, 듬뿍 바른 선크림도 소용이 없다. 거리엔 인적조차 드물다.

 

세비야 대성당은 이슬람 사원을 부수고 그 자리에 1402년에 건립하기 시작, 1519년에 완성을 본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성당과 연결된 '풍향계, 바람개비'란 뜻을 지닌 히랄다 탑은 전체 98m 높이로, 70m까지는 12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양식이고

그 위부터 꼭대기까지는 16세기에 덧붙여 세워졌다. 

성당 입구와 히랄다 탑의 맨 위엔 신앙의 승리를 상징하는 청동 여신상이 자리하고 있다.

 

콜럼버스 묘
화가 무리요의 그림

길이보다 폭이 더 넓은, 이슬람 모스크의 잔재가 보이는 성당 내부엔 콜럼버스 묘와 화가 무리요의 그림도 보인다.

콜럼버스 관을 들고 있는 4명의 거인은 당시 스페인의 4왕국을 상징한다고 한다.

아주 넓은 성당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단체 관광 온 50대 한국 남자 하나가 낮술에 살짝 취해 수작을 건다.

남의 나라 여행 와서 대낮부터 뭔일이래, 창피한 줄도 모르고.

 

히랄다 탑 오르는 길

높은 곳에 오르기를 늘 두려워하는 우리지만, 히랄다 탑엔 올라야 했다.

성당 입장료에 히랄다 탑 입장까지 포함되어 있으니까. 다행히도 계단이 아닌 경사로라 그다지 힘들진 않다.

28개의 종이 있는 종루까지 오르니 알카사르는 물론 과달키비르 강의 물결까지도 섬세히 보인다.

 

히랄다 탑에서

5시가 넘어, 지친 몸은 다시 호텔로 향한다. 뜨거운 더위에 장사가 없다.

볕을 피하기 위해 하늘을 가려놓은 모습은 유럽 대륙에선 스페인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닐지.

 

7시, 간단한 요기를 위해 미로 같은 산타크루즈 지구를 걸어다닌다.

싸고 맛있기로 유명한 '보데가'에 들러 몇 가지 타파스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셀프서비스로 운영되는 보데가를 나오면서 계산을 하려 하니 주인 아저씨는 계산서나 영수증도 없이 주문 받는 탁자 위에

분필로 아무렇게나 써두었던 숫자로 가격을 보여준다. 

 

산타크루즈 지구

배를 채우고, 알카사르 앞을 지나 강변에 위치한 '황금의 탑'을 보러간다.

정십이각형 황금의 탑은 통행 검문을 목적으로 1220년에 만들어졌고, 강 건너에 있었다는 팔각 은색탑 사이에 쇠사슬을 걸어

지나가는 배를 검문하고 항구를 방위했다고 한다.

황금의 탑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외벽에 금색 타일을 입혔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16-17세기에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을 보관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알카사르
황금의 탑
유로 2008 기간

앗, 아야, 이게 무슨 일이야.

황금의 탑을 보러 가는 길, 탑만 보고 부지런히 걷던 도중 불량 보도블럭 덕에 발목이 꺾여버렸다.

내 덜렁증을 탓하랴, 세비야의 불량 인도를 탓하랴. 그래도 황금의 탑은 봐야 해.

곧, 전화로 예약해놓은 플라멩코 공연을 보러가야 했으나 일단 호텔에 들어가 발등에 파스를 붙여야 했다.

오후 내내 무지하게 호텔에 들락거리는구만.

 

플라멩코 공연

플라멩코는 5세기초 안달루시아 지역에 들어온 집시의 춤과 노래가 안달루시아 전통 춤과 어우러져 형성되었다고 한다.

춤과 기타 반주, 노래와 손뼉으로 이루어지는 플라멩코에는 삶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애수와 정열이 담겨있다. 

 

공연 시작이 30분이나 남아있었지만 저택의 파티오에 무대가 설치된 플라멩코 공연장의 좌석은 이미 반 이상 채워져 있었다.

에고, 여기도 엄청나게 덥다. 흐느끼는 듯한 애수 어린 가수의 목소리와 기타 연주로 시작한 플라멩코는 잘 생긴 두 남녀 춤꾼의

열정적인 몸짓으로 1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그 애수 띤 무용수들의 깊은 눈빛, 끊임없는 박수 소리가 말해주는 말할 수 없이 깊은 감동.

 

플라멩코 공연은 끝났지만 그 여운이 너무나 길다.

여행 카페에서 본 정보를 떠올려 무료 플라멩코 공연 bar가 있다는 내 말에 쾌재를 외치는 두 밥돌.

다들 플라멩코에 제대로 빠지셨어. 그러나 막상 찾아간 그곳에서 그날 그시각에 공연은 없었으니 걸음을 돌릴 수밖에.

아쉬움에 거리를 걷다가 튀김집에서 사들고 들어온 튀김 -명란, 새우, 오징어- 한 바구니에 소박한 기쁨이 퍼진다.

 

애수 깊고 열정 어린 세비야가 저물고 있다.

 

 

< 2008. 6. 26. 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