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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17 스페인

8.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 1. 14 (토)

늦은 겨울 해는 오늘도 맑게 떠오르고, 어제와는 달리 온몸이 쑤시는 아침이다.

참 다행히도 여행 기간 내내 비 한 방울 안 떨어지고 우리 여행을 축복해 주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호텔 객실 창 밖엔 안달루시아의 정취가 흠뻑 느껴지는 그라나다스러운 집들이 여행객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모두 한국인만으로 가득찬 조식당에서 괜찮은 식사를 하고 또 캐리어를 챙겨 9시, 알함브라 궁전을 향해 호텔을 나섰다.

 

그라나다 호텔 창 밖 정경
나사리 왕궁의 입장시각이 미기재된 알함브라 입장권

가이드씨는 기타연주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려주고는 이슬람과 알함브라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슬람교는 우상숭배금지 철칙에 따라 모스크를 비롯한 모든 건축물에 동물과 사람 형상의 문양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 그래서 자연에서 찾은 소재를 추상화하고 정형화한 선과 형태인 아라베스크를 사용한다지.

 

로컬가이드가 나누어주는 수신기와 입장권을 받고보니 입장권에 기재되어 있어야 할 나사리 왕궁 입장시각이 없다.

알함브라 궁전 전체의 입장엔 크게 제한이 없지만-전엔 오전, 오후의 제한만 있었음- 그중 나사리 왕궁은 30분 간격으로 입장

시각을 정해두어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티켓에 명시된 입장시각이 아니면 나사리 궁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근데, 어, 단체여행객은 입장시각 없이 그냥 입장하나 봐. 시간이 안 적혀있어.

 

"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슬람 교도들의 지배를 받았던 이베리아 반도.그 이슬람 세력의 최후 거점이었던 그라나다에 이슬람 문명의 결정체인 알함브라 궁전이 세워진 것은 13-14세기에 걸쳐서였는데, 1492년 스페인에 함락된 이슬람 나사리 왕조 최후의 왕 부부는 알함브라 궁전을 떠나 북아프리카로 가면서 알함브라 궁전이 보이는 언덕에서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알함브라는 아라비아어로 '붉은 성'이란 뜻인데 이는 성곽 축조에 사용된 석벽이 철 성분으로 인해 붉은 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 예술의 호화로움을 보여주는 나사리 왕궁 성채인 알카사바, 16세기에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 그리고 이슬람 정원의 아리따움 자체인 헤네랄리페 정원, 이렇게 4지역으로 나뉜다."

(2008년 6월의 여행기 중  http://blog.daum.net/stelala/15537858)

 

헤네랄리페 정원
헤네랄리페 정원
헤네랄리페 정원

알함브라에선 곳곳을 입장할 때마다 바코드 인식기로 입장권을 체크하기 때문에 입장권을 잘 챙겨야 한다.

알함브라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들어간 지역은 14세기에 조성되어 꽃과 분수의 조화가 아름다운 헤네랄리페 정원이다.

한여름만큼의 푸르름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다른 나라의 겨울 정원에 비해선 정말 푸르고 싱싱하다.

이 넓은 정원을 이슬람 왕인 술탄은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넓기도 했고 또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란다.

 

헤네랄리페의 아세키아 중정
헤네랄리페
헤네랄리페

헤네랄리페 최고의 정원은 '수로'의 뜻을 지닌 아세키아 중정으로, 나무와 분수와 이슬람 건축물이 멋지게 어우러져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도 고아한 정취를 펼쳐준다. 역시 천국의 정원답고 물의 궁전다운 헤네랄리페다.

우린 또다른 분수가 리듬을 자아내는 정원을 지나고, 아치 형태의 나무 터널을 신나게 리듬을 타며 걷는다.

근데, 나무 터널 전에 뭔가 있어야 하지 않나, 헤네랄리페의 하이라이트인 '물의 계단' 으로는 왜 안 갔지.

 

그라나다 파라도르
카를로스 5세 궁전

카를로스 5세 궁으로 가는 길에 고성이나 귀족의 저택, 수도원을 개조한 스페인 국영호텔인 그라나다 파라도르가 있다.

대체로 파라도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그라나다 파라도르에서 보는 전망은 기대할 게 없어 보인다.

이슬람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은 후인 16세기에 건립한 카를로스 5세 궁전은 사면체인 외관과는 달리 안쪽은 원형이다.

이 공간은 연주회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데, 실제로 2008년 6월 이곳은 음악제 기간이라 무대와 좌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카를로스 5세 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

잠시의 휴식 시간, 카를로스 5세 궁전 건너편의 커피자판기에선 아주아주 느린 속도로 커피를 밀어낸다.

우리 몫의 6잔이 나오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기다리던 스페인(?) 여인 둘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로에게 말을 던진다.

우리는 우리 흉을 보는 게 아닐까- 둘이 줄서서 여섯 잔을 뽑아댔으니-하면서도 끝까지 꿋꿋이 커피를 쟁취했다.

 

카를로스 궁 근처 다른 쪽에서는 곁으로 다가가도 꼼짝도 않는 고양이 가족들이 평온하게 겨울 햇살을 즐기고 있다.

9세기에 지어진 붉은 성채인 알카사바도 자신의 자리에서 겨울 햇볕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다.

 

알카사바
알카사바
알카사바에서 본 알바이신

알함브라 궁전에서 가장 오래된 알카사바는 로마시대 요새 자리에 세워졌으며, 견고한 성벽과 망루를 갖춘 요새로 정비된 것은

13세기라고 한다. 성벽 안에는 병사들의 숙소, 지하 감옥, 저수조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취만 남아있다.

알카사바에서는 어제 야경투어를 했던 하얀 알바이신 지구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알카사바
알함브라 궁전 입구

알카사바의 가장 높은 곳에선 9년 전처럼 여러 개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스페인 국기는 물론이고 유럽연합의 깃발과 안달루시아 주기까지 빨강과 파랑과 초록 바람이 사면으로 분다.

2시간을 걸어다닌 알함브라, 마지막 순서인 나사리 궁으로 가겠지 하는데 알함브라에서 볼 수 있는 건 모두 봤다는 가이드씨.

이게 무슨 일일까. 나사리 궁을 뺀 알함브라는 팥소 없는 찐빵보다 더 말 안 되는 상황인데 왜지, 왜 나사리가 빠졌을까.

 

점심식사를 한 그라나다 식당

의문은 여전했지만, 인성 곱지 않은 가이드씨에게 나사리궁 미입장의 이유를 물어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기에, 우리 두세 명만

의아함을 주고받으며 점심식사 장소로 가만 이동한다.

그라나다 외곽의 한적한 식당에 준비된 파스타샐러드와 쇠고기스튜가 맛있고 깔끔하다.

여행 안내 유인물에 명시된 식사 종류와 메뉴를 완벽하게 꿰고 있는 쉬리언니의 말, 이번 여행의 음식 맛이 작년 여름 여행-

다른 지인들과 함께 한-에 비해 훨씬 훌륭하다고 한다.

 

고속도로 휴게소

오후 1시, 이제 남은 오늘 일정은 발렌시아 이동 뿐이다.

어제. 은후배가 준 귤과 사탕을 앞자리에 혼자 앉은 청년에게 건네주었더니 오늘 이 청년, 내게 껌을 내민다.

알함브라에 불던 겨울 바람과 도보 시간이 만만치 않았는지 버스 출발 후 오래지 않아 다들 깊은 잠에 빠졌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2시간 20분을 움직인 뒤 15분을 쉬었고, 다시 2시간 이동 후에는 휴게소에서 꽤 긴 휴식시간을 가졌으며,

또 1시간 30분을 움직인 다음에야 발렌시아 부근의 호텔에 들었다.

메마름과 척박함의 연속이었던 도로. 그동안 가이드씨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재로 한 영화 '길'을 화면에 띄워주었다.

 

호텔에 들어 여행 안내 유인물을 확인하니 그라나라 알함브라궁전에서 나사리는 내부 입장 아닌 '외관'으로 쓰여있었다.

여행 기획단계에서부터, 처음부터 나사리 왕궁 내부입장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빠에야가 포함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주택가에 자리한 호텔 위치를 힌트 삼아 기어코 큰 동네마트를 찾아낸 기특한 우리.

6인분의 크나큰 담소에 와인, 치즈, 라면-포트는 은후배 공수-을 곁들인 밤이 환하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