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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23 포르투·리스본

4월 14일 (금) : 세상의 끝, 카보다호카

밤도 아니고 새벽도 아닌 자정 넘은 시각.

골목에서 시끄러운 바퀴 소음이 계속 들려서 여행객이 끄는 캐리어 바퀴 소리인가 하며 거실 창 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시의 청소부들이 골목길 쓰레기통을 끌어 쓰레기를 비우는 소리다. 

알파마의 돌바닥 소음은 상상을 초월해 어마어마하다.

 

새벽 1시반 잠이 들고 오전 7시에 눈을 떴다.

거실 밖 앞집 지붕 위엔 어제 아침처럼 지붕 끝 자리에 앉아 비둘기가 구슬프게 울어댄다.

상추와 버섯 호박볶음 그리고 볶음김치와 계란프라이를 올린 비빔밥이 아침식사 메뉴, 오늘 아침도 푸르게  맑다

 

호시우 기차역 부근
호시우 기차역 부근 광장 : 조형물
호시우 기차역

오늘은 리스본 근교 여행을 하는 날, 다른 날보다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지하철역 승강장에 엄청난 수의 리스본 시민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오전 9시가 다 된 시각인데, 늦게 출근하는 저녁형 삶인가, 객차 내부는 승강장보다 더 붐빈다. 

지하철 Restauradores역에 내려 Rossio 기차역까지는 도보다.

 

호시우역 티켓발매기도, 창구도 기다리는 줄이 모두 길다.

우린 창구를 택했고 10분 만에 왕복 기차 티켓-보증금과 기차 탑승 2회 충전-을 구입했다. 

신트라행 기차는 출발까지 15분 이상 남아있고 개찰구 가까운 객차는 매우 혼잡했기에 한적한 뒤편 객차로 움직였다.

평일인데도 기차에 승객이 이렇게 많다니, 출발 시간이 임박하자 한적했던 우리 객차도 만석이 되었다.

 

앗, 여행 책자를 숙소에 모셔두고 온 것 같아 가방을 뒤져보니 역시나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으나 이젠 꼭 한번씩 까먹고 잃고 놓친다. 나이듦의 증거다.

확인해 보니 습관대로 휴대폰과 USB에도 파일이 저장되어 있다. 책자가 없어도 문제가 없으니 다행이다.

객차엔 어린 꼬마들이 조잘거리고, 대화하는 사람들의 음성으로 시끌벅적하다.

 

신트라
신트라
신트라 왕궁

10시 20분, 신트라역에 도착했다.

다를 여기서 내리는지 혼잡하다. 특히 개찰구 주변은 사람들이 빠져나가지 못한 채 계속 정체다.

신트라역은 승하차를 위해 기차역을 드나들 때 승객마다 반드시 플랫폼 입구의 개찰구에 티켓을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은 신트라가 아니다.

목적지는 카보다호카인데, 그곳엘 가기 위해선 신트라나 카스카이스역까지 이동한 후 버스를 타야 했기에 신트라에 잠시 들른 것이다.

신트라 구시가로 가는 길을 구글이가 엉터리가 알려주는 바람에 오락가락하다가 구시가 왕궁 앞에 안착했다.

 

신트라
신트라
신트라

산을 끼고 자리잡은 신트라에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

하얀 왕궁 외관을 둘러보고 타일 장식 가득한 예쁜 건물을 바라보고 언덕의 계단과 좁은 골목도 걸어본다.

점점 늘어나는 사람들. 파브리카나타에서 나타와 샌드위치, 카페라테를 구입해서 왕궁 앞 야외 벤치에 앉았다.

 

신트라역

점차 흐려지는 하늘, 구름도 많아지고 바람은 더 거세졌다.

카보다호카로 가기 위해 신트라역에서 미니버스 1253번에 제일 먼저 승차했다.

12시 50분에 출발한 미니버스는 헤갈레리아 별장 앞 산길을 빠르게 오르내리고 몬세라트 옆길도 거침없이 달린다.

 

한적한 버스 안, 기사가 사나운 운전을 하는 동안 버스 뒤쪽에 자리한 청춘남녀의 대화도 거침없다.

흑인인 백인 남자와 백인인 오스트리아 여자는 간호사라는 공통 직업을 매개로 다이나믹한 대화를 이어간다.

응급실 이야기, 번아웃 이야기, 결혼과 이혼, 사생활 얘기까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기사의 난폭 운전과 남편의 거침없는 통역으로 호카곶까지 가는 50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카보다호카
카보다호카 : 십자가탑

1시 40분, 카보다호카다.

하늘은 구름 덮혀 흐리고 생각보다 바람이 심하게 불진 않는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 너머엔 대서양이 넘실대고, 들판 앞엔 대형버스에서 내린 한국인 단체여행객이 무리지어 걷고 있다.

 

Cabo da Roca, 호카곶은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 지점이며 대서양 연안에 위치해 있다.

카보다호카의 십자가 탑에는 포르투갈 시인인 카몽이스의 시에서 표현된 '여기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어서 이곳이 대륙의 가장 서쪽 끝임을 알려준다

 

대서양
대서양
카보다호카

땅의 끝이고 바다의 시작인 이곳에 서니, 그저 모든 것이 덧없다.

측량할 수 없는 이 넓은 대양에 시름도 욕심도 다 던져버려야 할 것 같았다.

좀처럼 맑은 하늘을 보여주지 않는 호카곶이지만, 등대와 절벽과 들판이 대서양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해안 풍광을 자아낸다.

 

카보다호카
카보다호카

카보다호카를 떠나는 아쉬움을 두고 1624번 버스에 올랐다.

카스카이스로 가는 버스는 난폭 운전의 진수를 보여준다. 진짜 지금까지 이런 버스는 없었으니까.

속도 제한 30km 도로를 60-70km로 냅다 달리고, 교통 신호를 지키지 않고, 승차 대기자가 있는 버스 정류장을 제멋대로 통과한다.

 

난폭 운전으로 신고하는 방법이 있다면 진심으로 신고하고 싶었다.

40분 거리를 30분도 안 걸려서 카스카이스에 도착했다. 버스 운행 시각에 늦은 것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걸까.

여러 도시에서 겪은 바를 종합하면 포르투갈은 난폭 운전이 만연한 곳이라는 결론이다. 

 

카보다호카와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데 카스카이스의 하늘은 거짓말처럼 파랗다.

포르투나 리스본, 신트라와는 경치나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마치 다른 나라의 휴양지 같았다. 

돌바닥을 물결 문양-포르투갈 시그니처-으로 채운 메인 거리를 걷고, 즐거운 내음 가득한 바닷가를 거닐었다.

 

거리의 카페 야외 자리에 앉아 맥주와 감자튀김를 주문했다.

그런데 기다리고 먹는 사이, 아니 자리에 앉기 전부터 옆 테이블 할아버지 4-5명이 동시에 줄담배를 피우고 있다.

옆에서 한꺼번에 끊임없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는 바람 따라 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난 남편에게 계속 툴툴거렸고, 남편은 유럽에선 어쩔 수 없으니 감수하라고 화를 내며 쏘아붙인다.

처음엔 별것 아니었던 작은 말다툼은 큰 언쟁이 되고 결국 커다란 싸움이 되었다.

 

맥주만 주문해서 5분 만에 후딱 마시고 자릴 떴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아니 옆 테이블 상황을 파악하자마 바로 그곳을 벗어났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초점은 공감력 없는 어휘와 어투다. 평소에도 담배 연기에 민감한 내게 그래야 했을까.

 

카스카이스 시내에 돌아다닌 것을 후회했다. 

여길 들르지 않고 기차역에서 바로 리스본-신트라에서 리스본보다 카이스카이스에서 리스본이 더 가깝다-으로 갔어야 했다.

 

더운 열차는 카스카이스역에서 지연 출발하고, 난 열차 안에서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리스본 Sodre역에서 버스로 숙소까지 가는 동안, 아니 숙소에 도착해서도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난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2010년 마카오 이후 여행지에서 겪은 최악의 날이다.

함께 하는 여행을 정녕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