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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서유럽 이야기

프랑스 2 : 비와 그라스

새벽부터 휘몰아치는 비바람이 심상치 않다.

하늘을 보며 하루 날씨를 점쳐보았지만, 도대체 답이 없는 날씨다.

 

니스 버스터미널

오늘 일정의 중심인 그라스(Grasse)에 가기 위해선 우선 버스터미널까지 버스로 움직여야 한다.

터미널의 인포에서 그라스 행 버스 시각표를 받아든 후, 살펴본 터미널은 왠지 어수선한 분위기다. 

9시 50분에 출발한 버스는 온갖 정류장에 다 멈추다보니 니스에서 40km밖에 안 되는 그라스까지 가는데 1시간반이나 걸렸다.

그렇게 도착한 그라스 거리는 이미 폭 젖어있었지만, 다행히 비는 거의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라스 버스터미널에서 구시가 가는 길

향수의 원조가 된 그라스는 예부터 마을 주위 산기슭에서 야생화를 경작하고 채취하여 향수를 추출하였고, 중세부터

자연 향수를 제조하였다고 한다. 그라스는 원래 질 좋은 가죽 가공지로, 조향 기술은 그로 인해 발달했으며 18세기

부터는 조향사들이 가죽공장에서 독립하여 향수를 제조하게 된다.

 

18세기 말엔 프라고나르(Fragonard) 향수 공장이 설립되었고 몰리나르(Molinard)와 함께 가장 오래된 향수회사로 꼽힌다.

현재도 세계 유명 조향사의 대부분이 그라스 출신이거나 그 후손이라 하니 그라스 향수산업의 전통은 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프라고나르 향수공장

그라스 구시가 입구에 있는 프라고나르 향수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의 안내원이 무료 가이드 투어가 시작됨을 알려준다.

후다닥 합류하여 공장 내부 관람을 마치고 샵과 박물관을 둘러보는데,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오래된 향수병들이 이채롭다.

 

프라고나르 향수박물관

어제 마트에서 산 크루아상과 바게트를 뜯어먹으며 향수 마을 곳곳을 쏘다녀보기로 한다.

낡은 듯 운치있는 거리 어디선가 영화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남프랑스의 고풍스러움이 풍기는, 비에 젖은 길목마다 향수 가게가 늘어서 있고, 향수 가게 사이에 오목히 들어선

빵집에서 또하나의 바게트는 하루 묵힌 바게트보다 훨씬 고소하고 맛있다.

 

촉촉한 대기 속에 펼쳐진 그라스의 건물들이었지만 내겐 왠지 건조해보였다.

향토빛과 적토빛 색감 때문이었을까, 적토빛 벽에 손을 대면 그 색깔이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그라스 시청사

그라스 시청사 앞에 이르자, 큰밥돌의 휴대폰이 대목을 맞는다.

긴 통화를 참아내지 못하고 이내 쏟아지는 빗줄기.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가만 하늘을 덮어준다.

 

빗줄기는 약해지는 듯하다 다시 세차지고 있다.

상대편이 지나치게 강할 땐 맞설 게 아니라 살짝 돌아가줘야 한다. 구시가를 빠져나와 큰길가 카페에 들었다.

 

카페는 점심식사를 하는 사람들, 차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우린 이미 크루아상들과 2개의 바게트로 위의 용량을 채웠기에 카푸치노와 핫초코만 주문했다.

서빙하는 여인은 무려 60대 할머니~

게다가 카페를 나설 땐 중년의 여주인까지 계산이 잘못된 영수증을 내놓는다.

 

'여기요, 우리는 셋이거든요, 근데 4잔 주문한 영수증이네요.'

여주인은 미안하다 하고, 정신없는 여주인을 힐책하는 듯한 할머니의 표정은 유머 자체다.

 

그쳤으리라 예상했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만난 수많은 비 중에서 가장 끈질지고 강인한 비다.

그래도 비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구시가를 걸어, 아까는 찾지 못했던 구시가의 작은 분수와 기분좋게 조우했다. 

 

그라스 터미널에서 니스로 오는 버스 안, 밥돌들은 잠에 빠졌다.

버스의 종점인 니스 터미널까지 가지 않고 호텔 근처-라고 추측되는 곳-에서 버스를 내린 건 쓸만한 선택이었다.

파도 거친 니스 해변을 또 거닐어본다.

 

다시 니스

숙소로 돌아와보니 어제처럼 오늘도 청소가 되어있지 않다. 수건 교체나 샴푸 보충을 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큰밥돌의 명- 요즘은 여행 가서 귀찮거나 자잘한 건 다 작은밥돌을 시킴-으로 작은밥돌이 리셉션에 확인한 바,

수건 교체나 샴푸 보충은 1주일 이상 머물 때만 해당되는 사항이고, 원할 경우엔 별도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 

비치된 수건은 6개나 되니 걱정 없고, 샴푸는 챙겨온 것만으론 살짝 부족할 수 있겠지만 그냥 버티자고.

 

많이 걷진 않았지만 빗속을 거닐었던 하루가 고단하다.

깊지 않은 밤, 감은 눈 위로 그라스의 낭만적인 향기가 퍼지고 있다.

 

< 2008. 10. 31 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