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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17 스페인

사족 3 : 패키지여행상품을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이유

1년 전에 경험한 처음이자 마지막 스페인 패키지여행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우린 빈에 살면서 바르셀로나는 2007년 겨울에 3박 4일간 둘러보았고 이듬해 여름엔 마드리드와 세비야, 그라나다,

말라가를 7박 8일 동안 여행했다.

몇 년을 머물렀던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여행한 도시 중 세비야는 두브로브니크와 함께 최고였다.

친절하고 예쁜 호텔, 끝없는 감동을 준 플라멩코, 늘 시야에서 빛나던 세비야 대성당, 멀리서도 아름다운 황금의 탑.

 

런데 스페인 패키지여행 후엔 스페인에 대한 좋은 추억을, 스페인의 매력을 다 완벽히 잊어버렸다.

스페인 남부를 다시 가고 싶어했던 기억마저 완전히 사라졌다.엄청나게 각오(?)하고 떠난 패키지여행이었지만,

패키지라는 상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나와 맞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가 전부 철저히 패키지 여행객만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이동 거리가 길고, 원하지 않아도 정해진 장소에서의 긴 쇼핑 시간이 주어지고, 여행지의 랜드마크만 찍고 가는 -'나 거기

봤어'가 목적인- 수박겉핥기식 관광 등 일반적 특징 이외에 패키지여행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를 꼽아본다.

 

 

그라나다 호텔 주변

1.  오로지 단체여행객만을 위해 존재하는 호텔

 

일반적 패키지상품의 호텔 위치는 도시 중심부에서 매우 멀다.

스페인 패키지에선 변두리 주택가, 폐업한 주유소 옆, 공장지대, 편의시설 없는 이름모를 기차역이 대부분이었다.

3성급(2급)이건 4성급(1급) 호텔이건 대동소이했으나, 4성급 호텔이 시설도 물론이지만 위치면에서도 조금 나았다.

 

7박 동안 머문 호텔 중 글로벌 숙소예약사이트인 부킹닷컴에도 나오는 호텔은 3~4개였는데, 비슷한 시설의 중심부 호텔과

숙박비를 비교해보니 50-60%선이었다.

개인 예약-그 위치의 호텔을 예약할 자유여행자는 거의 없을 듯하나-도 반값이니 단체 숙박요금은 훨씬 더 저렴할 터.

 

대형버스를 위한 주차장이 마련돼 있고 장거리 이동의 출발과 도착에 용이하며 여행객 관리도 편리-밤에 개인적으로 나가기

어려우니 안전사고가 일어나기 힘듦-하고 무엇보다 숙박비가 싸니 여행사 입장에선 선호할 수밖에 없다.

또한 머문 호텔들엔 거의 모두 한국인 단체여행객들이 있었고 특히 3성 호텔은 숙박객 대부분이 한국인 단체였다.

호텔 자체나 그 주변이 늦은 저녁에 차나 맥주 마실 공간도 없고 아침식사 후 산책할 공원이나 거리조차 없다.

개인 여행객은 결코 선택하지 않는, 단체 여행객을 위해 존재하는 호텔이 바로 패키지상품의 호텔이다.

 

사라고사 호텔의 조식당
코르도바 식당

2. 단체여행객만을 위한 식당

 

개인여행도 대체로 그렇긴 하지만, 패키지여행에서도 조식은 호텔 조식당을 이용하게 된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호텔에서 패키지여행객이 식사해야 할 탁자나 위치가 딱 정해져 있었다.

규모가 작은 호텔의 경우 조식당이 협소한 이유로 탁자 위에 단체의 이름을 적어놓기도 했고, 4성급 대규모 호텔은

단체투숙객과 일반투숙객의 식사 자리가 분리되어 있기도 했다.

 

위 사진 중 사라고사 호텔의 조식당은 오른쪽이 단체석인데, 학생식당처럼 쭉 탁자를 붙여놓아 비좁고 불편했다. 

게다가 단체석 중에서도 좌석이 정해져 있었다. 한국 A팀은 이 줄, 한국 B팀은 저 줄, 한국 C팀은 그 옆 줄.

사진 왼쪽의 일반 좌석은 테이블이 각각 떼어져 있고 테이블마다 작은병에 든 잼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일반과 단체의 숙박요금이 다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당연한 패키지의 속성을 참을 수가 없다.

 

중식이나 석식도 마찬가지다.

호텔 말고 밖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 이용하는 식당은 거의 패키지여행객들-특히 한국인-대상의 식당이다.

한국식당이든 중국식당이든 현지식당이든 위치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외곽에 위치하거나 식당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고 현지인들이 다니는 거리에 있는 식당에 갔을 때도 단체여행객으로만 북적였다.

여행사가 계약한 저렴한 식당, 현지인들은 모르는 식당, 버스 정차나 주차가 편리한 식당에서 대부분 밥을 먹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단 한 번, 람블라스 거리 끝의 해변 부근 레스토랑이 제대로 된 유일한 식당이었다.

 

나사리궁 입장시각이 명시되지 않은 알함브라궁전 입장권

3. 가장 중요한 볼거리가 빠진 관광

 

여행객들이 그라나다를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알함브라 궁전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그라나다의 꽃은 알함브라 궁전이고 알함브라의 꽃은 나사리 궁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알카사바, 카를로스5세 궁전, 히네랄리페 정원, 나사리 궁전',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압권은 이슬람 극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나사리 궁전이다.

알함브라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 대부분이 나사리궁이고, 네 지역 중 한 곳만 봐야 한다면 그건 마땅히 나사리궁인 거다.

나사리 궁전은 입장객 수를 제한하기 때문에 입장 시각이 정해져 있고 입장권엔 그 시각이 명시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알함브라 측에서 단체여행객들에게 주는 나사리궁 입장권 수를 엄청나게 줄여버렸다고 한다.

사실 개인이 알함브라 입장권을 구입하려면 홈피에서 미리 예약하거나 아침 일찍부터 알함브라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서야 한다.

여행사들은 지금까지 노력 없이 엄청난 혜택을 누렸던 것인데, 이젠 여행사도 그 혜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알함브라에 도착하기 전엔 우린 누구도 이런 상황을, 즉 나사리 궁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알함브라 관람을 마친 후 여행 안내 유인물을 살펴보니 6pt쯤 되는 크기로 '나사리 궁(외관)'이라 쓰여있었다.

결국 우린 나사리 궁을 제외한 알함브라만 보았고, 9년 만에 한번 더 만나고 싶었던 나의 나사리 궁은 이미 떠나버렸다.

알함브라를 보기 위해 그라나다에 와서 알함브라의 정수는 못 보고 주변만 본 셈이었다.

편히 받던 입장권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 그 어떤 대처도 하지 않는 여행사, 여행객을 배려하지 않는 여행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비야 플라멩코 공연장

4. 정체 불명의 공연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의 영혼이다.

그들의 환희와 고통이 몸짓과 노래, 박수, 기타 연주로 표현된다.

2008년 여름밤 세비야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처음 보았을 때, 엄청난 감동으로 온 마음이 저렸었다.

 

그런데, 패키지에서 관람한 플라멩코는 한국인과 중국인 단체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정체 불명의 공연이었다.

세비야 변두리에 위치한 공연장이었고, 개인이 혼자 와서 관람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세비야 중심가에서 벌어지는 유명한 플라멩코 공연도 많은데 이런 저급한 공연을 찾아 일부러 입장하는 개인 여행객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10-15분짜리 짧은 공연이, 플라멩코라 할 수 없는 공연들이 여러 차례 이어졌다.

클래식이 흐르고, 현란한 춤이 이어졌다. 가볍고 얄팍한 몸짓만 계속되니 감동은커녕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한 스페인 패키지상품은 2017년 1월에 출발한 7박 9일짜리 상품이었다.

손꼽히는 대형 여행사-L관광-였고 다른 곳보다 높은 가격을 책정해 놓은 여행사 상품이었다.

그러나 어느 여행사를 통해 패키지여행을 하든 일정이나 이동은 물론, 외곽에 위치한 호텔, 단체여행객용 식당, 핵심을

외면하는 관광, 단체여행객용으로 만들어진 공연은 마찬가지일 거고, 이는 내가 패키지여행을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이유다.

 

요즘 자유여행의 장점을 살리고 패키지여행의 단점을 보완한 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사들이 성업 중이라 한다.

기존 패키지여행에 지치고 불만족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나는, 나만의 그리고 우리만의 자유여행이 좋다.

우리 인생처럼 여행도, 우리가 직접 대본 쓰고 연출하며 우리가 출연하고 스스로 감동 받는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