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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숨은 그림 찾기

(33)
겨울은 겨울은 바람이 깊다 마른 나무 이파리가 깊다 하늘 닫는 끝빛이 깊다 길 위 시간이 깊어간다 지나는 이들의 눈빛이 깊어간다 서 있는 이의 저미는 추억이 깊어간다 덧없는 내 애상이 깊어만 간다 이젠 찾고픈 꿈길이 퍼붓는 눈발만큼이나 깊어만 깊어만 간다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사랑과 미움이 저리게 만나는 아픈 길목 아무 까닭도 없이 때론 누군가 내 여린 발목을 걸고 지쳐 굽어진 등을 누르고 고단한 영혼을 휘젓는다 산다는 것은 견디어내는 것 이길 자도 이겨낼 자만도 그 아무 것도 없는데 견디어내라는 마음겹고 쓰라린 주문만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 산다는 것은 그러나 살아지는 것 그리고 살고 싶은 것 내가 만드는 찬란한 진주와 그것이 선사한 환희와 그 안에서 찾아낸 파랑꽃 피동에서 영롱한 능동이 되는 것 산다는 것은 그래도 사랑하는 것 눈물 자국보다 허약한 미소가 소망일 수 밖에 없음을 누군가 뜨겁게 찾아주기를 바라는 것 산다는 것은 어스레히 어스레히 알아가는 것
사랑 사랑 어딜 봐도 누굴 봐도 겨울이었다 돌아갈 사람은 돌아갔을 것이다 최면 같은 빈 걸음 걸이 가슴 끝에 매달려 주절거리는 폐지가 된 기억 그러던 날 낡고 좁은 내 커튼을 흔드는 누가 있다 밀칠수록 밀려드는 홀연한 내음 연연한 꿈처럼 누가 오고 있다 올 수 없으리라 여겼던 새봄이 오고 있다 사랑이 내 안에서 다시 살고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여린 별 노니는 가을 밤 닫힌 창 사이로 거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길목마다 매달린 불빛 스산한 자국 찍으며 바람은 소리없이 구르고 벤치에 기대었던 연인들은 애처로이 자리를 뜬다 그러는 사이 눈에 밟히는 내 손가락 마디마디 그러쥔 그대 남긴 애틋한 끝자락 노래가 되고 전율이 되어 흘러드는 그대
너의 그림자 너의 그림자 내 입김이 애써 놓아주었던 너의 그림자가 다시 보인다 숱한 계절이 내 앞을 스치며 옅어가던 네 반쪽짜리 그림자 가을은 나뭇잎을 숨기고 내 창 앞 연못을 숨기고 내가 걷던 골목을 숨기러 왔을 뿐인데 머무는 가을 등 뒤로 시린 어스름 같은 너의 그림자가 비친다 돌아온 너의 그림자는 마음 걷는 곳마다 나를 따르고 내 눈빛에 잠시 뒤척일 뿐 여전히 나를 에워싸는데 가을 내음이 멀리 날아가야 너의 그림자도 돌아서려하니
망각 망각 이젠 사랑하지 않는다 내 눈과 귀를 돌아 나온 바람은 애잔한 숨을 쉬며 마당에 엎드린다 돌쩌귀 아래 흙 알갱이 둘은 애달픈 설화 같은 이별을 하고 떨어진 분홍 꽃 이파리들은 어느 결에 실려 게우듯 흐트러진다 그러는 사이 흙 마당 깊은 구석에 처음 아는 진홍빛 꽃이 자란다. 이젠 돌아가지 않는다
추억 추억 오래된 일기장에 그대가 있습니다. 손 끝 떨림도, 가슴 일던 바람도 한 가지 이유였지요. 어깨를 마주하고 걸으며 멀리 같은 곳을 보았습니다. 시간이 우리를 놓을 때까지 함께 걸어가리라는 마음은 드러내지 않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우리를 놓아버리기 전에 지난 흔적은 멀리 앞서버렸습니다. 가라앉는 마음을 건져 올리며 그제야 느낍니다. 그대가 내게 준 별들을. 바스라지지 않는 기억들을.
달 낮바다에 달빛이 떨어진다. 달이 보이지 않아도 그 빛은 물결로 피어 올라 내 눈에 걸터 선다. 저리고 저린 꽃같은 그리움의 모서리를 안고 달빛은 나의 낮바다를 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