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43)
캠프 어제 아침, 학교 일정에 따라 작은밥돌이 잘츠카머구트로 5일간의 캠프를 떠났습니다. 6학년이 되면서 버스로 혼자 다니던 등교길을 오랜만에 셋이 함께 해 봅니다. 이건 무슨 즐거운 행운의 징조인지. 학교에 거의 다다를무렵 앞 BMW승용차의 번호판이 무려 BMW입니다. 아이들은 모여서 담임선생님의 얘기를 들은 후 부모님들 웃음을 모으며 버스에 오릅니다. 울녀석의 동그란 옆통수도 보이네요. 며칠 간의 이별이 아쉬운 듯 버스를 향해 끝없이 손을 흔듭니다. 인종, 민족, 국가를 막론하고 부모의 자식 사랑은 한결같은가 봅니다.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집 안이 텅비어 종일 고요합니다. 이번 캠프엔 휴대전화를 가져갔기에 어제 오후엔 안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녀석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음 정도 올라가 있었지요. 이..
아이들의 전시회 4월 26일 목요일. 작은밥돌이 10주 동안 정성 들여 준비한 exhibition 발표회가 있는 날. 5학년 학부모들은 교내 극장으로 모여들고 영어 짧은 엄마 혼자는 절대 안 된다는 작은밥돌의 신신당부 따라 큰밥돌도 시간 쪼개 일찍 퇴근한 날이다. 오후 6시. 학년부장교사의 간단한 인삿말이 끝난 후 연구하고 취재하고 실험한 결과를 토대로 만든 아이들의 보고서 발표와 드라마 공연, 필름 상영이 이어진다.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오는 웃음들은 끊이지 않고. 금연, 지구 온난화, 에이즈, 동물 사냥, 식품, 고대 문화, 광고, 빈의 명소 등 2-4명이 조를 지어 조사하고 연구한 주제와 소재가 참으로 다양하다. 조별로 정성껏 만든 자료 앞에서 손님들의 질문에 열심히 대답하는 동심들. 작은밥돌 조에서 만든 'junk ..
봄날은 온다 3월 첫 금요일, 작은 축하연에 갔다가 무르익은 분위기 탓에 기름 몇 방울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어른들의 자리가 재미없었는지 들락거리기만 하던 작은밥돌도 놀라고. 그뒤 별다른 일도 없었건만 주니어스위트룸 숙박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3월 첫 주말, 큰밥돌 회사가 법인회원으로 있는 골프장엔 사람들의 움직임이 드물지 않다. 어느 중년부부의 매무새엔 정다운 포근함이 흐르고 주변 포도밭에는 비 젖은 봄이 움튼다. 골프장이 살짝 내려보이는 곳에 자리한 예쁜 호텔~ 아,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이 상쾌함. 그러나 낯선 하룻밤이 겸연쩍었는지 작은밥돌의 몸뚱아리는 나른해지고 있었다. 며칠을 앓고난 녀석에게 찾아온 나른함의 다른 정체는 바로 봄이었다. 녀석에게도 봄날은 오고 있다. 감기에 걸려 학교에 가지 못한..
그녀들의 속마음 이번 주초, 종영을 코 앞에 둔 드라마 '주몽'의 한 장면. 고구려 황후인 소서노는 십수년 만에 나타난 주몽의 첫 아내인 예소야에게, 예소야가 마땅히 황후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말하자 예소야도 이에 질세라 자신은 아들에게 아버지를 찾아주고 싶었을 뿐, 몸을 추슬렀으니 곧 궁을 떠날 것이라는 뜻을 전한다. "흠, 고구려 황제의 두 아내가 다 황후 자리를 마다한단 말이지? 그럼, 내가 가야겠군." 우스개로 던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른 큰밥돌이 답변을 한다. "가라, 가, 가라고~" "그럼 지금 즉시 타임머신 대령하렸다. 1분 내로 타임머신을 준비 못하면 네 목을 칠 것이다!" 드라마 속 이 두 여인네가 나눈 대화는 진심일까. 길고도 험난한 여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며 이제는 귀하디귀한 자리에서 근심없이 ..
쉼표 아닌 쉼표 '아까 서울로 전화를 했더니.'하면서 시작되는 큰밥돌의 말. '왜, 무슨 일 있대?' ' OO가 힘든가 봐, 농담처럼 비엔나로 좀 불러달라네.' '우와, 그럼 잘 됐다. 내가 서울로 가고, OO가 비엔나로 와서 밥 하면 되겠네~' 다시 요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행 다녀온 지 시간이 좀 흘렀거나 해가 지나치게 일찍 떨어지거나 몇날 며칠 날씨가 비실거리거나 많아진 집 안 일 때문에 버틸 수 없을 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증세다. 귀찮고 짜증스럽고 삶이 싫어진다. 해 짧은 요즘 같은 때에 새벽 5시 반에 일어나는 것은 분명 힘에 부친다. 새벽부터 밥상 차리고 도시락과 간식 챙겨주는 것도 힘겹다. 아이 등하교 시키는 것도, 공부 봐주는 것도 쉽지 않다. 서울 살 때는 결혼 후에도 12년이나 직장생활을 지..
보내는 마음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오스트리아에도 한국인들의 모임이 있다. 송년 모임에 참석할 이유가 있는 큰밥돌을 따라 작은밥돌까지 대동하고 송년회가 열리는 호텔로 들어섰다. 혼자선 안 가겠다고 버티는 통에 예정 없이 갑작스레. 아늑한 정문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매직펜으로 쓴 커다란 한글~ ".... 두번째 계단을 이용하여 2층으로 올라오시기 바랍니다." 다른 곳에 들르느라 조금 늦게 입장했더니 애국가가 울리고 있다. 씩씩하게 따라부르는 작은밥돌~ 300석 넘는 홀을 익숙한 빛깔의 얼굴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간단한 1부 순서를 치르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공연과 여흥과 이벤트가 있는 길고긴 2부~ 한국인과 결혼한 오스트리아 아저씨가 무대에 올라' 서울서울서울'을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애잔하게 부른다. 특별히 좋..
겨울 건너기 우르릉 통통통 피시식.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던 보름쯤 전 토요일 밤. 미묘한 요동과 함께 요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뭔 소리래? 꾸벅꾸벅 졸다 말고 화들짝 놀라 큰밥돌에게 물어보니 차에 탈이 난 듯했다.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 시각과 도로였지만,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을 반기듯 갑작스레 달라붙던 옆 차선의 승용차를 피하느라 속력을 줄이지 못한 채 핸들을 틀었던 까닭, 차선 사이에 턱이 있을 것이라 전혀 짐작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급히 근처에 차를 세우고 차의 상태를 살펴보니, 이런이런, 오른쪽 앞뒤 두 타이어에 모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스페어타이어는 분명 하나밖에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차를 그곳에 그대로 두고 귀가하는 쪽을 택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우리를 집까지..
바보 같은 가을 가을이다, 빼도박도 못하게 푸르기만 한. 비엔나 근교의 마이어링엔 고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아들 유부남 아돌프는 17세의 베세라와 사랑에, 아니 불륜에 빠져 황실의 사냥터였던 이곳 수렵관에서 둘이 함께 세상을 버렸다 한다. 마이어링 부근의 하일리겐크로이츠도 가을이다. 수도원과 지방자치 사무소에는 꽃과 신록과 낙엽이 공존한다. 뫼들링의 하늘도 높푸르다. 수목이 빛깔을 바꾸듯 사람들의 낯빛에도 가을이 그려져 있다. 도로에서 만난 어느 차량의 스포츠음료 광고 대형 캔에도 가을이 실려있고 작은밥돌 학교 앞 주차장의 고독한 1인 승용차도 가을을 앓고 있다. 그제 입금한 은행 계좌 입금증(이 나라는 통장 없이 계좌번호 적힌 카드만 발급)을 우연히 어제 다시 확인한 바, 계좌번호와 금액은 일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