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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빈에서 부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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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살이를 시작하며 눈을 뜨니 서울이 아니라 비엔나였다. 꿈속에서 어딘지 모르는 도시를 헤맨 건 미처 새해 들일 채비가 안된 탓. 9개월 만에 만난 서울은 이상스레 낯설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도, 길고 긴 지하철 열차도, 산을 덮고 있는 고층아파트도. 정말 사람은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라더니 그새 타국의 빛깔에 익숙해졌나 보다. 20년 넘게 살던 내 동네를 들르니 그때서야 익숙함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친구들과 동료, 선배들 모두 내가 서울을 떠나오던 작년 봄처럼 즐겁게 또 볶아대며 살고 있었다. 소중한 가족들 역시 같은 모습으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서 마주할 내 나라가 있다는 건 작지 않은 축복이었다. 웃으며 떠들 친구들과 가족이 있다는 건 삶의 다사로운 원동력이다. 건조한 유럽의 겨울을 윤기 있고 매끄럽게 지..
창가에서 # 1. 빵집 아가씨 우리 집 앞 지하철 역내에 '데어만'이란 빵집이 있다. 그곳 직원들은 모두 주홍빛 옷을 차려입고 이른 새벽부터 손님을 맞는다. 출퇴근 시간이나 등교 시간이면 항상 붐비는 그곳에 유난히 눈에 띄는 직원이 있었다. 무표정한 낯빛에, 짙은 눈화장이 특이한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친절한 직원들 사이의 그녀는 늘 첫눈에 띄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녀의 왼쪽 눈동자는 심하게 일그러져 움직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 눈은 언제나 많은 가닥의 머리카락 아래에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그녀는 매일 아침 빵집을 기쁘게 연다. 그녀의 맑은 오른쪽 눈빛엔 삶의 의지가 있다. # 2. 그 아저씨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 중엔 오스트리아나 유럽으로 유학 왔다가 눌러 사..
겨울비 이른 아침 안개를 걷어올리고 나니, 하루종일 겨울비가 내린다. 11월 추위 덕에 미리부터 올겨울을 경외시했는데, 요즈음 며칠은 친절할 정도로 포근하다. 비바람 방향을 제대로 견적 못한 작은밥돌의 우산은 아침부터 뒤집혀버리고, 바쁜 등교길을 되돌아와 아파트 처마 아래서 우산 살을 매만지고 있으려니 적지 않은 비임에도 초연하게 온몸을 적시는 젊은 남자 하나가 지나간다. 우산을 바로하고 지하철로 향하는 도중에 만나는 많은 사람들 역시 우산없이 걷고 있다. 비를 피하려는 마음은 물론, 몸을 덜 젖게 하려 애쓰는 몸짓도 찾아보기 어렵다. 비는 내리고 있고 내리니까 맞을 뿐이다. 비켜가려 하지 않는다. 점심 시간. VIS 한국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친한 분과 함께 그 자리에 갔고,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반갑다. ..
어떤 겨울날 11월, 아무리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나라라지만, 아무리 국토 대부분이 알프스에 둘러싸인 나라라지만, 우리나라 한겨울 같은 매서운 된바람과 모진 기온과 매일 같이 조금씩 혹은 된통 쏟아지는 눈을 오랫동안 대한민국 11월에 길들여진 몸이 따라가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9월에도 바람만 불면 롱코트를 걸쳐대는 비엔나 사람들에게서 난 이미 깨달아야 했다. 그들의 겨우살이 채비는 그때 벌써 끝난 것이었음을. 그제 내린 눈은 어제의 맑은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남아있는데 오늘 아침 또, 팝콘처럼 퍼붓는 눈에 난 정말 울고 싶었다. 유난히 미끄러움에 약해 빙판길과 상극인 나. 다행히 1시간 만에 눈은 거의 그쳐주었고 그사이 재빨리 거리를 구르는 제설용+미끄럼방지용 작은돌들. 작은밥돌을 학교에 집어넣고 잠시 들른 도나우젠..
아름다운 평등 며칠 내내, 심장마저 에는 바람이 불어대더니 오늘은 바람결이 더없이 부드럽다. 오스트리아에서 맞는 네번째 계절이다. 지금은 겨울이라 덜하지만 여름엔 공감의 깊이가 10배, 20배는 더해지는 생각. 천혜의 오스트리아라고 할만한 이유를 알아본다. 오스트리아는 지리적으로 유럽 중심이다. 동쪽과 동북쪽으론 헝가리, 체코와 접해 있고 서쪽과 서남북 방향엔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의 국경이 놓여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 서쪽에 위치한 잘츠부르크는 유럽의 한가운데라고 한다. 예부터 교통의 요지임은 말할 것도 없다. 또, 탁월하고 아름다운 자연 환경. 내륙 국가라 바다가 없는 대신 바다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호수들이 많고 수확이 풍성한 옥토가 있다. 국토의 2/3가 알프스에 둘러싸여 있어 겨울이면 세계의 스키어들이 몰리기..
젖니 뽑는 날 우리 아들녀석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이 뽑기다. 3년 전, 흔들리는 앞니를 해결하기 위해 치과를 찾았을 때, 입을 앙다문 채 진찰대에 누워있는 걸 본 순간, 난 알아챘다. 녀석의 진짜 최전방 공포를. 인내심 약한 의사는 금세 발치를 포기했고, 난 녀석을 달래고 위협하여 다음날 손목을 잡아 또 치과엘 갔으나 역시 실패. 그보다 더 어렸을 때 받았던 충치 치료엔 의연했었는데 집으로 돌아와 눈물 빠지게 야단을 맞았으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들 이 뽑기의 돌격 선봉장은 남편이었다. 우리 어릴 적 쓰던 고전적 방법, 손도 못 대게 엄살 부리는 녀석의 흔들리는 이를 튼튼한 실로 묶은 후 한눈 파는 사이 쑤욱~ 그저께 목요일 아침, 학교엘 가기 위해 지하철로 향하던 중 난데없이 이를 뽑아야 한다는 녀석. 녀..
비엔나의 가을 기호가 오늘 아침 또 캠프를 떠났다. 지난 여름의 캠프와는 다르지만. 기호는 3박4일 동안 학교 선생님, 친구들과 지낼 일을 즐거워만 하며 학교로 향했다. 언어-이번엔 영어- 안 통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낙천적인 성격이라 이번엔 특별한 염려는 안하기로 했다. 그런데, 캠프 준비 기간 동안 기호가 다니는 VIS에서 보여준 자기 방어 체계는 정말 철저했다. 가정통신문에는 캠프 기간에 아이가 문제를 일으킬 경우에 대한 물질적인 책임 소재를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보험을 들거나 부모가 전액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었지만 아직은 우리나라 정서 기준으로는 지나친 사전 방어는 왠지 비인간적인 느낌이 들었다. 자기 자식이 사고 치면 안 물어낼 부모가 있나. 어쨌든 보험을 들었고..
세례 받는 날 기호가 세례를 받았다. 비엔나로 이사한 다음날인 8월 7일, 운터슈팅켄브룬 성당에서 많은 분들의 축복 속에 의식을 치렀다. 세례는 VIS 입학과 이사가 결정되기 전에 받기로 했던 것이라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미안함이 멍울지는 상황이지만. 세례 받기 전, 성당에서 신부님의 지도대로 예행 연습을 하고 집에선 성가 연습도 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했다. 세례 받는 날. 기꺼이 대부를 자청해주신 전(前) 비거마이스터-시장. 시골이니 우리 동장 쯤-는 물론, 학교 교장선생님과 독일어선생님, 마을 어른들, 남편 친구 가족들까지 모여서 성대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기호 혼자 받는 세례이고 오스트리아가 카톨릭 국가라 처음부터 끝까지 정통 그대로 의식이 이루어졌다. 기호 마음이 두 뼘쯤은 자란 것 같다. 어린 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