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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이탈리아 1 : 로마의 겨울

< 2008년 12월 25일 목요일 > 

 

흐리고 쌀쌀한 아침, 비엔나의 전형적인 겨울 날씨다.

아침 거리엔 차량이 드물었지만 공항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길 떠나는 유랑객이 꽤 많다.

 

메인 터미널의 맞은편에 위치한 별도 터미널은 온통 에어베를린 데스크 뿐이다.

금세 체크인을 하고 슈트뢱-오스트리아 체인점 빵집-에서 산 빵을 셋이 사이좋게 뜯어먹으며 게이트 앞을 지킨다.

에어베를린과 공동운항하는 오스트리아 저가항공사인 니키 항공이 오늘 우리를 로마까지 실어나를 예정이다.

 

빈 공항

로마. 재작년 여름, 미칠 듯한 더위와 대안 없는 무질서를 보여주었던 곳. 그때와는 정반대 계절에 그곳을 다시 찾는다.

질서의 극치였던 그곳을, 유럽을 떠나기 전 마지막 여행지로 한 치 망설임 없이 낙점 짓게 만든 로마의 힘은 무엇일까.

 

탑승한 지 얼마 안 되어 음료와 간식을 제공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이게 웬 횡재람.

갑자기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샌드위치를 받아든 작은밥돌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에공, 그럼, 김밥은 안 싸도 되는 거였잖아.

 

정신없이 꿈속을 걷다 보니 금세 로마다.

잔뜩 흐려 있었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황당한 일.

우리 짐이 나올 컨베이어벨트가 고장이 났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벨트도 안 돌고 짐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아무말 없이 열심히 기다리기만 하는 승객들.

이탈리아 사람들이 저렿게 느긋할 리가 없는데, 참말로 이상하군, 다들 여행객들인가.

암튼 30분도 더 기다려 겨우 가방을 찾아들고 로마의 관문인 테르미니 역으로 향한다.

 

테르미니역

30분 만에 도착한 테르미니역. 2년반 전의 기억을 더듬어 출구를 찾아 역 코앞에 자리한 호텔에 들었다.

그런데 호텔 리셉션의 나이 지긋한 직원은 우리가 예약한 금액보다 더 높은 숙박비를 제시한다.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꼭 챙겨야 할 것이 예약확인서다. 직원 눈앞에 컨펌메일을 들이미니 그제서야 원래 숙박비를 말한다.

바가지 제대로 쓸 뻔했잖아. 이탈리아 너네 예전이나 지금이나 왜 그러니.

 

좁지도 넓지도 않은 객실에 앉아 우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김밥 먹기다.

비행기에서 먹은 샌드위치로는 허전했는지 이미 공항역과 기차 안에서 김밥 일부를 먹었으나 허기를 채우긴 부족했다.

김밥을 열심히 모두 챙겨먹고 나니 3시, 이젠 객실을 탈출해야만 하는 시각이다.

 

테르미니역

테르미니역 주변엔 재작년 여름처럼 흑인들과 남미인들이 많고 지저분한 거리와 결여된 질서 의식도 여전하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역 주변의 많은 상점들은 휴점 상태다. 자, 역사 순례를 시작해볼까나.

 

재작년엔 잠겨있어서 들어가지 못했던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

‘한여름의 눈’이라는 계시와 전설로 5세기에 기초가 세워진 성당이라 하는데 고대 로마 바실리카 양식이 웅장하고 독특하다.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

그저 상점 건물처럼 보이는 산 피에트로 빈콜리 성당은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평범한 외관과는 달리 보물들이 가득했다.

빈콜리’란 이름은 베드로가 예루살렘과 로마의 옥에 갇혔을 때 묶였던 쇠사슬로, 성당 내부의 주제단 아래 보관되어 있었고,

남쪽 회랑엔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인 ‘모세상’이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가려진 모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동전이 필요했다.

동전의 힘을 빌려야만 잠시동안 장엄한 조각상을 마주할 수 있었기에 로마제국의 후예가 벌인 상술에 마음이 씁쓸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소액이라도 입장료를 받든지 말이지.

 

산 피에트로 빈콜리 성당

다시 만난 콜로세움, 여름날의 뜨거웠던 체온이 떠오른다.

그때는 지쳐서, 심장 속까지 너무 지쳐서 원형의 콜로세움 내부를 걷는 내내 발걸음조차 떼기 힘겨웠는데, 겨울에 만나는 콜로세움은

또 다른 분위기를 선사한다.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콜로세움의 외관은 2000년 전 고대 로마를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별로 걷지도 않았건만 호텔로 돌아오니 고단하다.

잠시 뒹굴거리다가 테르미니 역으로 나가,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역시나 영어는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슬로우푸드가 되어나온 햄버거.

에고, 게다가 빵 속의 내용물은 반밖에 안 차 있어 부실하기 짝이 없다.

로마의 바가지와 불친절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런데, 이런 로마엘 우린 왜 또 온 거지.

 

저녁을 먹고 생각해보니 이탈리아용 전기 플러그를 또 잊었다.

재작년 여름에도 챙겨오지 않아 테르미니 역의 지하 마트에서 구입했는데, 같은 일을 또 하게 생겼다.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니거든, 도대체 왜 그런대. 밥돌들은 나이를 들먹이며 깜빡증을 부추긴다.

나도 한때는 총명했었다고.

 

흐린 밤 기운을 맞으며 로마의 밤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