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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이탈리아 2 : 신화가 숨쉬는 거리

< 2008년 12월 26일 금요일 >

 

어제 로마행 비행기에서도 정신없이 꿈속을 헤맸는데, 오늘 새벽에도 꿈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눈 뜨자마자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7시반, 호텔 규모에 비해 작은 식당엔 이른 시각인데도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그다지 손 가는 메뉴가 없는 평범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향한다.

 

여행시 늘 가지고 다니던 멀티플러그와 2년반 간격을 두고 로마에서 산 이탈리아용 플러그 2개

먼저, 잊고 온 이탈리아용 플러그 구입을 위해 테르미니 역 상가의 슈퍼마켓에 들었다.

이탈리아 플러그는 핀이 3구이고 굵기가 우리나라 것보다 가늘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자제품은 이탈리아의 콘센트에 바로 연결할 수 없다.

물론 오스트리아 전자 제품의 플러그는 핀이 2구이긴 하지만 이탈리아 것과 같은 굵기이기 때문에 사용 가능하다.

어쨌든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디카가 우리나라 출신(?)이라 이탈리아용 플러그는 필수였다.

다행히 딱 하나 남아있는 플러그를 구입하고 보니 재작년에 산 것이랑 색상만 다를 뿐 완전히 같은 제품이다.

 

로마의 지하철 노선은 A선과 B선, 둘 뿐이다.

도시 규모나 인구에 비해 또 여행객 수에 비해 말도 안 되게 부족한 상황인데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도시 구석구석에 산재해있는 고대 유적들 때문에 더 이상의 지하철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고대 유적이 지하철 건설 불가의 이유가 되다니, 조상들이 물려준 풍요로운 관광자원이 말도 못하게 부럽다.

 

포폴로 광장

A선을 타고 도착한 포폴로 광장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광장으로 가는 길목엔 우산 파는 흑인들이 보인다. 우산을 펴드는 우리를 향해 판매하는 우산을 들어보인다.

베르니니가 장식한 포폴로 문, 자그마한 쌍둥이 성당, 포세이돈과 아테나와 스핑크스 지키는 광장의 울타리가 비와 어우러져

아련한 정취를 만든다.

 

스페인 광장

예전 여름, 숨막히는 더위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던 영화 ‘로마의 휴일’이 만든 명소인 스페인 광장에도 비가 내린다.

스페인 계단 앞의 조각배 분수도, 문 닫은 명품 거리도 한결같이 영화스럽다.

 

트레비 분수

로마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린다는 트레비 분수, 그 여름에 보았던 그 분수 그대로다.

경찰차도 여전하고 물빛도 여전하고 분수를 장식하고 있는 포세이돈 가족도 또 여전하고, 남들 다 던지는 동전을

절대 안 던지는 우리도 여전하다.

 

판테온
라파엘로 묘

판테온에 이르니 비가 거의 그쳐간다.

여름의 로마는 미로였는데, 겨울에 다시 찾은 로마는 미로에서 벗어난다. 두 번째라 낯설지 않아서겠지.

 

판테온의 뻥 뚫린 9m 지름의 천장을 통해 아침부터 계속 비가 들이쳤는지 중심부엔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입구로부터 중심을 건너 저편으로 이탈리아의 천재화가인 라파엘로의 묘가 있다.

어른 둘이 판테온에 다시 온 감회를 풀어내는 동안 작은밥돌은 오랜만에 발견한 긴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있다.

 

크리스마스를 보낸 나보나 광장엔 연말 장터가 한창이다. 

고소한 냄새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다보니 팝콘 가게. 작은밥돌이 얼른 팝콘 한 봉지를 챙긴다. 

고대 경기장이 있던 긴 직사각형의 광장엔 여러 개의 분수가 멋스러움을 더한다. 

오벨리스크와 함께 조성된 4대강 분수도 멋졌지만 우리 눈엔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포세이돈 분수가 더 빛이 낸다.

 

나보나 광장

나보나 광장 근처에서 점심 먹을 곳을 찾아보니 썩 마땅한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여행 카페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다시 판테온 근처로 가서 나폴리 피자 체인점인 ‘Zio Ciro'에 들었다.

사람들이 가득 찬 실내를 보니 맛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는데 역시 주문한 피자와 파스타가 맛있다.

 

Zio Ciro

재작년 여름, 무더위와 강행군으로 스쳐 지날 수 밖에 없었던 캄피돌리오 광장엘 이번엔 가뿐히 올라본다.

디오스 쿠로이-제우스의 아들들-가 호위하고 있는 언덕을 지나 미켈란젤로가 만든 광장에 이르면 신들의 화려한 경연 속에

로마 시청사가 나타나고 광장 한 켠엔 로마 건국 신화 속 늑대 젖을 먹는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긴 완전한 신화의 세계야, 아주 완벽해.

 

캄피돌리오 광장

베네치아 광장 앞 흰 건물은 이탈리아 통일(1870년)을 이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으로, 20세기초에 어졌다.

고고한 자태, 정교한 부조, 멋진 근위병은 물론 기념관 상륜에서 바라보는 로마의 광경은 새로운 로마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름하여 로마의 재발견, 우린 어느 새 여름날의 로마를 잊고 있었다. 로마가 아주 좋아졌다는 큰밥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캄피돌리오 광장 쪽으로 돌아가 그 앞에서 64번 버스에 올랐다.

눈에 익은 거리들을 지나 하차한 테르미니 역 상가를 다시 쏘다니다 호텔로 돌아오니 3시가 지나있다.

잠시 쉬는 동안 낮잠대마왕 큰밥돌은 금세 단잠에 빠져든다.

 

이른 저녁,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햇반과 즉석쌀국수로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그런데, 햇반은 좀처럼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여행하면서 햇반 챙겨온 건 처음인데 이런 배신을 때리다니.

 

공화국 광장

7시가 지나 다시 밖으로 나가, 공화국 광장 주변의 한 레스토랑에 앉았다.

쓸만한 분위기의 그곳엔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맥주는 물론 샐러드와 칼라마리도 아주 로마스럽다.

테르미니 역의 서점에서 유럽 여러 나라의 언어가 새겨진 책들을 구경하다 슈퍼마켓에 들러 맥주와 간식을 또 챙겼다.

오늘은 어째 종일 테르미니 주변에서 서성이는 것 같네.

 

여름과는 다른 로마를 느낀 하루, 겨울 훈풍이 머리칼을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