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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04~08)/남유럽 이야기

이탈리아 3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 2008년 12월 27일 토요일 >

 

간밤에 3차례나 잠에서 깼었나 보다. 숙면을 취하지 못해선지 몸이 썩 가볍진 않다.

오늘은 작은밥돌의 생일. 생일이 늘 크리스마스 연휴 즈음이다 보니 오스트리아에 살면서부터는 여행지에서 생일을 맞는 경우가 많다.

생일 축하해, 아들~

 

객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맑고 푸르다.

8시 50분, 어제 캄피돌리오 광장 앞에서 숙소로 돌아올 때 탔던 그 64번 버스에 오른다.

오늘의 행선지는 64번 버스의 종점인 바티칸이다. 12월 25일과 26일 이틀동안 휴관이었던 바티칸 박물관은 사실 이번 로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기도 했다. 재작년 여름 로마 여행시에 이탈리아 국경일도 아니면서 로마만의 휴일에 딱 걸려 관람하지 못한

바티칸 박물관이 내내 아쉬웠었다.

 

산 피에트로 성당

바티칸 앞인 듯한 정류장 앞에서 내려야 할지 말지 잠시 망설이던 사이 버스는 출발해버리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다시 바티칸 방향으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된 노부부와 함께 버스를 내리며 웃음 어린 눈인사를 나눴다.

기억을 더듬어 산 피에트로 광장에 이르니 2년반 전의 여름이 생생히 떠오른다.

온 세상 사제들이 다 모인 듯한 미사, 그땐 멀리서나마 교황의 모습도 보았었다.

 

바티칸 박물관 가는 길

산 피에트로 광장을 지나 도착한 바티칸 박물관 앞엔 엄청나게 긴 줄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9시반이 넘은 시각. 바티칸 박물관은 일요일은 휴관이지만 예외적으로 매월 마지막 일요일은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25-26일이 휴관이긴 했지만, 28일이 무료관람일이라 오늘은 관람객이 좀 적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기대는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꼬불꼬불한 관람 대기줄에서 심심치 않게 한국말이 들려온다.

50분 가량 기다려 입장을 한 후 검색대를 거쳐 티켓을 구입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완벽한 자유.

본격적인 관람을 앞두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스도의 변용
성 히에로니무스

먼저 눈길 가는 대로 회화관(피나코테카)에 들었다.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변용’을 찾아본다. ‘그리스도의 변용’(1520년)은 추기경의 요청으로 신과 인간의 속성을

함께 표현한 작품이라 하는데, 종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나름대로의 통찰력으로 그림을 바라본다.

회화관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완성작인 ‘성 히에로니무스’(1480년)도 눈에 띈다. 그의 상징인 사자가 곁을 지킨다.

 

피냐의 안뜰

사람들을 따라 가다 보니 솔방울 정원을 자랑하는 피냐의 안뜰. 계획했던 관람 순서와는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다.

워낙 방대한 박물관이라 미관람 상태에서 세웠던 계획을 제대로 실천하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하긴 했다.

그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 작품들을 빼먹지 않기만을 바랄 뿐.

 

이집트 신화 속 아누비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아누비스-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같은-를 발견하곤 작은밥돌이 즐거워한다.

그리고 이어서 펼쳐지는 그리스 로마 신들의 향연. 드디어 피오클레멘티노관과 벨베데레의 안뜰에 이른 것이다.

기원 전에 제작된 ‘토르소’, ‘라오콘 군상’, ‘페르세우스’, ‘헤라’, '헤라클레스' 등 셀 수 없이 많은, 정교하고 세밀한 그리스로마의

영웅들과 신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다.

나와 작은밥돌은 정신을 놓은 채 신들의 꽁무니만 따라다닌다. 도대체 이 많은 신들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라오콘
페르세우스
토르소
헤라, 헤라클레스

테피스트리 갤러리를 지나 지도 갤러리에선 양쪽 벽에 전시된 지도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천장의 아름다움만이 길고 화려한 축제 속을 거니는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지도 갤러리

이젠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는 곳은 바로 라파엘로의 방이다.

16세 초에 그려진 ‘아테네 학당’엔 시간을 초월해 성인과 학자들이 화합한 모습이 보여지는데, 좌우 벽감엔 그리스로마 신화

아폴론과 아테나가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파타고라스,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유클리드, 조로아스터는

물론 화가 자신인 라파엘로도 묘사되어있다.

생각보다 거대한 성체 논쟁’은 예수의 성체가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고리임을 표현한 그림이라 한다.

 

아테네 학당
성체 논쟁

바티칸의 하이라이트인 시스티나 소성당에 입장한다.

정면과 천장의 거대한 벽화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정면 제단화가 바로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이다. 촬영 금지인 줄 모르고

-다른 전시실은 촬영 가능-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은 채 찍고 있는데, 관리인이 와서 심하게 만류를 한다. 바로 사과 후 카메라를 넣었다.

 

미켈란젤로가 혼자 무리한 자세로 작업을 하느라 등이 굽고 무릎엔 물이 고였다는 일화를 남긴 천장화가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고개를 꺾고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엔 전율이 흐른다. 다들 감동에 빠져 웅성거리고 있을 때 관리인들이 조용히

하라며 관람객들을 강하게 제압한다.

 

촬영금지인 줄 모르고 노플래시로 찍은 '최후의 심판'

길지 않은 시간동안 바티칸 박물관에 머물렀는데, 내부의 조도가 낮은 데다가 앉을 곳조차 없어 온몸이 노곤하다.

찾다찾다 겨우 발견한 피자리아에서 피자와 파스타로 점심을 해결한 후 산 피에트로 성당으로 향했다.

 

산 피에트로 광장
피에타

아침과는 달리 잔뜩 흐린 하늘이다. 성당 입장 줄도 만만치 않다.

또다시 검색대를 거쳐 역대 교황과 주교들이 잠들어있는 지하묘지를 지나 성당 내부에 들었다.

여전히 화려하고 아름답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도 여전하고 성인 베드로 상도 여전하다.

 

산탄젤로 성과 산탄젤로 다리

2년반 전에는 멀리서 슬쩍 지나치기만 했던 산탄젤로 성과 산탄젤로 다리를 이번에 가까이서 만끽한다.

특히 산탄젤로 다리 위의 조각상이 유난히 아름답다 했더니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이라고 한다.

로마와 바티칸의 곳곳엔 이탈리아 국보급 예술가들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돌아오는 64번 버스 안에 승객들이 가득하다.

테르미니 역에 도착하니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 새떼들이 하늘을 검게 수놓는다.

돌아온 호텔 객실에서 큰밥돌은 바티칸 박물관에서 사온 책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작은밥돌은 또 피자를 먹겠다고 한다.

그러렴, 생일인데 뭐. 저 너머 천국 같은 바티칸에도 어둠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