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리고 눈이 떠진다. 밤새 오랫동안 꿈길을 거닌 덕에 아주 가뿐한 아침이다.
햇반 식사에 커피와 과일까지, 그리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나란히 입에 물고 쉔브룬으로 간다.
쉔브룬 궁전은 빈에 살 때 심심하면(?) 가던 곳이다. 궁전 내부만 해도 난 너댓 번은 관람했다.
우리집 남자들은 나보다는 횟수가 적지만, 그래도 최소한 세 번은 내부를 들여다 봤었다.
나야 뭐, 빈에 살 때 전업주부였기 때문에 손님 올 때마다-남편과 아들은 회사와 학교로 가고- 손님들과 함께
다니다보니 내부 관람 횟수가 조금 더 되는 편이다.
우리의 이번 쉔브룬 여행의 목적은 빈에 살 때도 자주 그랬듯이 정원이다.
궁전 뒤편으로 아름답게 펼쳐진 정원, 그 정원의 끝엔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엔 전승기념비인 글로리에테가 있다.
몇 년 전 어느 화창하고 따스한 봄날, 글로리에테 야외카페에서 마신 아인슈패너를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맑고 상쾌한 아침, 쉔브룬은 공사 중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한여름에 쉔브룬을 공사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공사 중인 궁전 외관은 궁전과 똑같은 크기와 모습의 그림으로 가려져,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엔 크게 영향이 없었다.
꽤 이른 아침이었지만, 사람들이 많다. 가볍게 정원을 걸어본다.
갖가지 화려한 꽃들이 향연을 이루고, 정원 끝 포세이돈 분수는 시원한 물줄기를 선사한다.
글로리에테는 가까이서 바라본 것으로 만족하고, 오늘은 글로리에테를 대면하는 등산(?)은 하지 않기로 했다.
쉔부른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도나우젠트룸으로 가는 도중, 깜빡 잊고 지날 뻔했던 나슈막에 들렀다.
유명한 재래시장인 나슈막엔 늘 그랬듯이 활기와 생기가 넘친다. 사람들의 표정도 여전히 행복해 보인다.
우리들의 추억이 끝없이 묻어있는 곳, 도나우젠트룸(Donauzentrum)으로 간다.
어느 새 11시가 넘어있다. 22구의 카그란 역에 위치한 도나우젠트룸은 멀티쇼핑몰이다.
의류샵을 중심으로 신발과 가방, 시계, 보석 가게는 물론이고 식품, 문구, 완구,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가게에다가 카페, 레스토랑,
패스트푸드점, 와인샵, 슈퍼마켓, 우체국, 극장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 공간을 자랑한다. 역시 22구에 있던 우리 집과도
멀지 않은 거리였고, 아들이 다니던 학교와도 지척에 있었기에 우린 도나우젠트룸을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
앗, 도나우젠트룸도 공사 중이다.
남편이 도나우젠트룸 1층의 우체국에 머무는 사이, 나는 아들 녀석이랑 우체국 맞은편의 해산물 레스토랑 체인점인
노트제(Nordsee)에서, 예전에 가끔씩 사먹던 감자 튀김(Kartoffelbox)을 먹으며 즐거운 추억에 빠졌다.
쇼핑몰 내부의 길고 긴 복도를 걷고 또 걷고 하다 보니 마치 내가 다시 빈의 시민이 된 듯했다.
추억은,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선물을 내밀어준다.
이번 빈 여행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인 슈트란트카페(Strandcafe)는 도나우젠트룸에서 아주 가깝다.
트램으로 1-2정거장 거리인데, 어찌하다보니 반대 방향으로 타게 되어 다시 내려 건너편 트램으로 갈아타는 일을 벌였다.
빈에 살 때 대중교통 이용 횟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남편은 빈 대중교통의 고수(?)인 나를 따라 무조건 트램에 올랐던 것인데,
역시 길치라는 나의 속성은 도무지 감춰지질 않는다.
슈트란트카페에 도착하니 도나우강이 그대로 펼쳐진다.
여름 햇살이 따갑다 보니 파라솔 없는 강 위 좌석은 미오픈 상태고, 평일 낮인데도 파라솔 있는 테이블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자리를 잡아 슈페어립과 부드바이저 맥주를 주문했다. 아, 오랜 만에 느끼는 부드바이저의 거품~
햇살도 맑고 강 주변 정경도 아주 멋지다.
도나우강 저편엔 IAEA 본부가 있는 UN 건물이 보이고, 또 빈으로 이사 와 처음 6개월을 살았던 고층아파트도 있다.
모두가 다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다.
슈트란트카페를 나와 지하철 카그란역으로 갈 땐 93A 버스를 타기로 했다.
빈에서 3년을 살았던 집, 그 집에서 카그란 역까지 오갈 땐 늘 이 버스를 타고 다녔었다.
앗, 이런! 안면 있는 멋진 기사 아저씨가 그대로 버스를 운전하고 있다. 버스에 오르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이렇게 사소한 일마저 눈물나게 기쁘고 반갑다는 것, 이것이 바로 추억의 힘이 아닐까.
이제 빈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있는 곳으로 발끝을 옮긴다.
'표류 > 2010 뮌헨·빈' 카테고리의 다른 글
8. 13 (금) : 빈숲과 판도르프 (0) | 2011.05.05 |
---|---|
8. 12 (목) 후 : 한여름밤의 축제 (0) | 2011.05.02 |
8. 11 (수) : 가장 평온한 세상, 프라터 (0) | 2011.03.06 |
8. 10 (화) : 빈으로 가는 기차 (0) | 2011.03.06 |
8. 9 (월) : 오버아머가우 그리고 린더호프 (0) | 2011.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