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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삶과 사랑 사이

파리에서 온 편지

2005년 3월부터 오스트리아에 살기 시작한 이후, 처음 떠난 긴 여행지가 파리였다.

사실은 미리 예정한 여행이 아닌, 곧이어 반드시 일어날 '어떤 무지몽매한 사건'의 공모자가 절대 되지 않기 위해

급히 파리로 도피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이후의 다른 여행과는 달리 준비가 매우 부족했고, 6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파리에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은 가장 떨어지는 여행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효율적인 여행이란 내가 원하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파리 여행은 무엇을 보고 어디를 걷고 무엇을 느껴야 할지 사전 사고가 거의 돼있지 않았었다. 

그러다보니 남들 가는 유명관광지만 따라다녔고 파리의 지저분함에 실망하기 바빴다. 

그래서 파리는 지금까지도 가장, 늘 아쉽다.

 

어느 날, 인터넷 서점에서 우연히 '어느 날, 파리에서 편지가 왔다'라는 책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광화문에 갔을 때 교보문고-거대한 인파의 집합소였다-에 들러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집어 한 장 한 장 넘길 때의

내 심장은 이미 파리 시내를 거닐고 있었다. 추억과 설렘은 순서를 잡지 못하고 한데 어우러져 마음에 맺혔다.

물론 글의 내용에 비해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긴 하지만, 새로운 파리를 알게 된 기쁨이 더 크다. 

 

언젠가 파리에 다시 가게 된다면 오르세 미술관에 갈 것이다. 

처음 파리에 갔던 그땐  너무나 무지해서 거대한 루브르 박물관도 수박 겉핥기로 둘러본 후, '루브르만 보면 충분해'하는 

바보 같은 생각으로 오르세 앞에선 계단에 앉아 셔터만 눌러댔었다.

그덕에, 이듬해 겨울,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고흐를 만난 후, 오르세의 고흐를 외면했던 일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던 에펠탑, 오감을 어지럽혔던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오르던 계단, 무미건조했던 샹젤리제 거리, 

규모만큼의 감흥을 주지 않았던 개선문, 그때의 파리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행의 깊고 짙은 의미를 그때도 알았다면 지금처럼 파리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으리라.

무슨 일이든 지나간 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지 않기를 이제서야 영혼의 끈을 조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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