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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2019 뮌헨·인스브루크·빈

7. 28 (일) : 다시, 서울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으로 돌아왔고 귀국행 항공기를 타야 하니 출국 수속을 해야 한다.

검색대는 SKYPRIOPITY 비즈니스클래스 탑승자 우선이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통과했으나 출국심사는 해당사항이 없다.

긴 줄에 서서 기다리다가 우리나라가 자동출국심사 해당국임을 알고 남편이 먼저 대열에서 빠져나와 자동출국심사를

시도하니 오호, 된다. 나도 얼른 자동출국심사줄로 가서 대기하지 않고 금세 수속완료.

 

스키폴 공항의 명물시계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더위에 시달린 터라,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했기에 공항 라운지로 가서 쉬어줘야 했다.

먼저 나혼자 들어선 라운지에서 음식을 챙겨 앉으려는데 저쪽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무리지어 나타났다.

ㅎㅅㄱ를 포함하여 남자 셋 여자 하나,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국회의원이다. 에이, 완전 눈버렸다.

난 원래 사람 얼굴 안 보고 다니는데 -오죽하면 여행 첫날, 항공기에서 바로 뒷줄에 앉은 배우 ㅈㅇㅅ도 몰라보고 안 봄.-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이 남의 나라 공항에서 쪽팔리는 줄도 모르고 크게 떠들어대니 눈길이 안 갈 수가 있나.

 

스키폴공항 라운지

다른 곳에 들렀다가 조금 늦게 라운지에 온 남편 왈, 젊은 여자 의원 ㄱㅅㅁ이 라운지 앞에서 탑승권 확인하는 직원에게

능숙한 한국말로, 나 탑승권 잃어버렸는데, 하더란다. 그래서 어쩌라고. 참말로, 수준하고는.

저 생명체들과 KLM 항공기 타면 안 되는데 하며 남편과 얘기하다가 우리가 내린 결론은 '저들은 대한항공 탑승!'이다.

KLM과 대한항공은 스카이팀 소속이라 같은 라운지를 공유하는 것일 뿐,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이 같은 항공기에

오르는 건 아니니까. 

 

KLM 비즈니스클래스 2층

우리가 탑승한 KLM 항공기엔 비즈니스클래스가 1층에 14석,  2층에 20석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2층은 다른 좌석 없이 비즈니스클래스만 20석이 있어서, A380 기종의 드넓은 2층 전체가, 94석이나 되는 비즈니스

클래스로 채워진 대한항공과는 달리 매우 조용하고 아늑하다. 비즈니스클래스는 좌석 수와 편안함이 반비례하니까.

항공기가 움직이기 직전에 젊은 여자 둘과 젊은 남자 하나, 중년 남자 한 명이 급히 탑승한 듯 보였던 것만 특이했을 뿐.

 

웰컴드링크에 이어 바로 저녁식사가 서빙된다. 

비트, 코코넛, 완두콩으로 만든 수프는 물론 새우 생선 요리도 아주 깔끔한 맛이다. 후식으로 고른 케이크도 굿.

타 항공사에 비해 음식이 정갈하고, 제공되는 식사량이 과하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식사하면서 '목격자'를 보다가, 암스테르담 산책이 피곤했는지 식사 후엔 바로 3시간 동안 잠에 빠졌다.

내내 고요하고 평화롭던 2층이 어수선해진 건 잠에서 깬 직후부터였다.

 

우리가 앉은 좌석은 77열로, 좌석 모니터 뒤쪽엔 좁은 선반이 붙어있고 그 앞은 비상구가 있어서 공간이 넓다. 

잠에서 깨어서 아까 다 못 본 '목격자'를 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무언가 시커먼 것이 내 시야를 가리는 것이다.

너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누군가 내 좌석 모니터 뒤쪽 선반 앞에서 즉, 초근접한 내 앞에서 알지도 못하는 중년남자가

선반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가방을 열어서 무언가를 휘젓고 꺼내고 하더니 그 가방을 들고는 자기 자리로 가는 거다.

저 사람, 뭐야, 자기 자리에서 하면 될 걸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정말 어이없고 무례하며 개념없는 인간이다. 

그러더니 조금 후, 똑같은 행동을 이번엔 우리 좌석 통로 저편 백인 앞에서 하고 있다. 과연 제정신인가. 

그 중년 남자는 항공기에 마지막으로 탑승한 4명 중 하나다.

 

73열 좌석엔 젊은 두 여자와 젊은 남자 하나가 있었는데, 젊은 남자가 짐칸에 있는 큰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다시 올려넣고 또 내려서 꺼내고 올리고를 셀 수 없이 반복하고 있다.

무한반복이야, 쟤 시지프스냐고. 눈앞에서 저러니 어찌나 어수선한지, 온통 시야가 어지럽고 고단하다.

착륙 후에 내릴 때 보니까 두 여자는 환복하고 모자를 썼는데 그제서야 든 생각, 걸그룹 멤버인가.

실제로 입국장에 도착하니 기자들과 팬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물어보니 걸그룹 ㅂㄹ** 중 2명이란다.

 

남의 자리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하고 또 옷걸이에 걸린 여자옷을 들고 오가던 무개념 중년 남자는 기획사 간부,

짐칸이 닳도록 짐을 내리고 올리기를 반복하던 젊은 남자는 로드매니저인 듯했다. 

우리가 비즈니스클래스에 많이 탑승해 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정신없고 무례한 사람들은 처음이다.

 

이런 어수선한 중 영화 '목격자'를 마무리지었다. 특별할 것 없는, 현실의 거울일 수도 있는 이야기.

집중이 안 되니 영화는 그만보기로 하고 승무원에게 컵라면을 요청했다. 

직접 끓은 라면은 아니지만, 하늘에서 먹는 라면은 진리다. 어떤 라면을 먹어도 다 맛있다.

 

아침식사
인천공항

기체는 점점 서울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침식사로 카이저슈마른을 골랐다. 달콤한 소스에 적신 슈마른이 고소하고 부드럽다.

 

7월 28일, 일요일 오후. 

열흘 만에 만난 나의 조국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아들들 잘 있었지, 다음에도 서울을 안전하게 부탁해. 알고 있겠지만, 우리의 타향병은 불치니까 말이지.

빈의 여름 열기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구 반대편 서울까지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